꽃과의 만남

경주시 첨성대 옆 동부사적지대(東部史蹟地帶)화단에 아름답게 핀 튤립.

풀꽃사랑s 2025. 4. 23. 10:26

신라(新羅) 천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계림(鷄林) 숲이 연두색 신록으로 곱게 물들어 있습니다.

경북 경주시 계림(鷄林) .

계림(鷄林)은 경주(慶州) 김씨()의 시조(始祖)인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숲입니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었던 숲으로, 시림(始林)이라고 하던 것을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후에 계림(鷄林)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탈해왕(脫解王=신라의 4대 왕) 4(60)에 왕이 금성(金城=옛날 신라의 수도, 현재 경주지역)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보니 금()으로 된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閼智)’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金氏)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閼智)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신라시대의 제5대 국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알지(閼智)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味鄒王=신라 13대 왕)입니다. 이후 내물왕(奈勿王)부터 신라시대가 끝날 때까지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鷄林)은 신성한 곳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조선(朝鮮) 순조(純祖=조선, 23대 왕) 3(1803)에 세운 김알지(金閼智) 탄생에 대한 비()가 남아 있습니다. 출처-경북 경주시 계림 숲 현지 안내문을 참고로 하여 새롭게 편집.

경주(慶州) 동부사적지대((東部史蹟地帶).

경북(慶北) 경주시(慶州市) 황남동(皇南洞) 동부(東部) 사적지대(史蹟地帶)는 면적이 약 13(39,325) 정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동서(東西)에는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내물왕릉(奈勿王陵), 남북(南北)으로는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에 닿아 있습니다. 신라 궁성과 관련된 대형 건물 유적이 분포되어 있고, 도로 교량 등 유적이 계속 확인되고 있어, 고대 신라와 통일 신라를 아우르는 중요한 유적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부 사적 지대는 2000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 월성 지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처=경주시 동부 사적 지대 현지 안내문 인용.

국보(國寶) 31호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첨성대(瞻星臺).

19621230일 대한민국(대한민국) 국보 제31호로 지정된 첨성대(瞻星臺),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인왕동(仁旺洞) 839-1번지에 소재(所在=어떤 곳에 있음)하고 있는 첨성대(瞻星臺), 동양(東洋)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天文觀測臺)입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지기삼사(知幾三事)를 참고 하면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27대 왕 재위 632~647) 때 축조(築造=쌓아서 만듦)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첨성대(瞻星臺)는 다듬은 돌을 받침대 위에 27단으로 겉모양은 신라의 토기처럼 원통형으로 쌓아 올렸는데, 높이가 9.17m, 밑지름이 4.93m, 윗지름은 2.85m로 축조(築造)되어 있습니다.

아래쪽 기단석(基壇石)에서부터 4.16m 되는 13단과 15단 사이 남쪽 허리에, 한 변의 길이가 1m인 정사각형 문이 정남향(正南向=정남 쪽 방향)으로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첨성대(瞻星臺) 중간쯤에 난 창문은 출입문이 있는 것은, 이곳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연구원들이 드나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도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쳐놓은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옛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조선시대, 1530년 중종(中宗) 25년에 왕명에 의하여 이행(李荇), 윤은보(尹殷輔) 등이 펴낸 인문 지리서. 전국을 도(), 군별(郡別)로 조목에 따라 서술하였으며, 지방 사회의 내력, 성씨, 묘사(廟社), 풍속(風俗), 관부(官府), 토산(土産=본디 그 지역에서 생산되거나 나는 물건), 인물 등 모든 면에 걸쳐 실은 백과사전식 서적)사람이 가운데로 오르내리면서 천문(天文)을 관측(觀測) 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첨성대(瞻星臺)인 정자석(井字石)에 올라 별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아 첨성대(瞻星臺)의 기능을 알 수 있다.

겉모양은 원통형으로 아래쪽이 배가 부르다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져 점차 수직으로 되어 있어서 안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첨성대(瞻星臺)를 축조(築造) 하면서 전체 돌의 개수는 401개를 사용했는데, 30높이의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상층부와 기단(基壇=건축물이나 비석의 기초가 되는 단)을 제외한 27단을 쌓아 올렸습니다. 첨성대(瞻星臺) 내부(內部=안쪽 부분)는 기단석(基壇石=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가 되는 단을 쌓은 돌)이 놓여 있는 밑바닥에서 제12단까지 자갈과 흙으로 채우고, 12단에서 26단까지는 속이 공간으로 비어 있습니다. 다만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우물 정() 자형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장대석(張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쪽은 바깥쪽으로 나가 있습니다. 27단 안쪽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판판하고 넓은 돌)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두께가 6이상이고 너비가 두께의 세 배 이상인 재목)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습니다. 판석(板石)은 길이가 156, 폭이 60, 두께 24입니다.

첨성대(瞻星臺)의 제일 마지막 꼭대기에는 (우물정)’ 자 모양으로 정자석(井字石)을 맞물려 놓았는데, 각각의 면이 가리키는 곳이 정확히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방향(方向)과 일치(一致=서로 어긋나지 않고 꼭 맞음)합니다. 이 정자석(井字石) 위에 천문(天文)을 관측(觀測) 할 수 있는 혼천의(渾天儀=지난달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장치)와 같은 관측기구(觀測氣球), 첨성대(瞻星臺)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春分), 추분(秋分), 동지(冬至), 하지(夏至) 등의 24절기(節氣)를 별을 통하여 측정(測定)하였고, 정자석(井字石)을 동서남북(東西南北) 방위(方位)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첨성대(瞻星臺)는 하늘을 관찰하기 위해 축조(築造)되었다고 알려졌지만, 그 용도(用途=쓰임새)에 대해서는 천문학자(天文學者)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의 학설(學說=학문상의 주장이나 이론 체계) 있습니다. 이는 첨성대(瞻星臺)가 천문학(天文學=우주의 구조와 천체의 현상 운행, 다른 천체와의 거리 및 관계 등을 연구하는 학문)의 상징물로 만들었거나, 하늘에 제사(祭祀)를 지내기 위한 제단(祭壇)이었다고 보는 것인데,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천문학자(天文學者)가 첨성대(瞻星臺)를 천문대(天文臺)대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천문대(天文臺)에서 천문(天文)은 하늘과 우주(宇宙)의 법칙(法則)을 관찰하기 위해 만든 단(=, 또는 시설)을 뜻합니다. 이 문장에서 단()은 천문대(天文臺)는 하늘과 우주(宇宙)의 법칙(法則)을 천문학적(天文學的)으로 관측을 수행하고 연구를 진행하는 터, 또는 시설을 뜻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는 천문관측(天文觀測), 국가의 길흉(吉凶=좋은 일과 언짢은 일)을 점치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큰 관심사였습니다. 실제로 첨성대(瞻星臺)가 축조(築造)된 삼국 시대(三國時代)에는 나라의 운명을 점치기 위한 주술적(呪術的=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려 재앙을 물러나게 하거나 앞으로 다가올 일을 점치는 것)인 목적으로, 또는 날씨를 예측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늘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觀察)했습니다. 특히 날씨를 예측하기 위한 관찰(觀察=사물을 주의 깊게 살펴봄) 활동은 역법(曆法=천체의 주기적인 현상을 기준 삼아 달, 날짜, 시간 따위를 구획하는 방법)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때 당시 역법(曆法)은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은 물론이고 지구(地球)에서 가까운 다섯 개의 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 절기(節氣)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이후 날씨를 예측하거나 달력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첨성대(瞻星臺)는 건물을 지을 때부터 천문학(天文學)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첨성대(瞻星臺)를 축조(築造)하는 데 사용된 돌의 개수는 362개로, 이는 1년의 날 수()365일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362개의 돌로 총 28()을 쌓아 올렸는데, 이는 별자리의 28(宿=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천문학에서 사용되는 별자리 체계로, 하늘을 28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별의 위치를 나타내는 방식)를 상징합니다.

첨성대(瞻星臺)의 네모난 창의 아래와 윗부분은 각각 12()의 석단(石段=돌로 만든 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1년의 12달과 24절기(節氣)를 뜻합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천문대(天文臺)를 건축하여 하늘을 관찰한 가장 큰 이유는 농사(農事)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 농업(農業)은 지금과 달리 날씨에 따라 많은 것이 결정되었고, 농사(農事)는 국가 경제의 기초였기 때문에 천문학(天文學)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27대 왕 재위 632~647) 때 축조(築造=쌓아서 만듦)된 것으로 추정되는 첨성대(瞻星臺)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天文臺)로 그 가치가 높고,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貴重)한 문화재(文化財)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월이 흘렀지만 매우 견고한 것은, 크기가 다른 돌을 서로 맞물려 쌓아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하였고, 내부에는 자갈과 흙을 섞어서 일정 부분 높이까지 채웠고 가장 약한 부분에 창을 냈으며, 몸통 부분을 단단히 하기 위해 맨 꼭대기에 정자석(井字石)을 올려놓아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건축 방법은, 옛 신라인들의 건축 기술이 얼마나 우수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또 첨성대(瞻星臺)는 천문학(天文學)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그때 당시 천문학(天文學)은 별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農事)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農業)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觀測)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吉凶)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별로서 점치는 복술)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을 관찰(觀察)하는 천문대(天文臺)는 신라(新羅)뿐 아니라 고구려(高句麗)나 고려(高麗)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료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부터 조선 25대 임금인 철종(哲宗) 때까지 25427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적은 사서(史書)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조선시대(朝鮮時代)1530년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中宗) 25년에 왕명에 의하여 이행(李荇), 윤은보(尹殷輔) 등이 펴낸 인문 지리서로, 전국을 도(), 군별(郡別)로 조목에 따라 서술하고 지방 사회의 내력, 성씨, 묘사(廟社), 풍속(風俗), 관부(官府), 토산(土産=본디 그 지역에서 생산되거나 나는 물건), 인물 등 모든 면에 걸쳐 실은 백과사전식(百科事典式) 서적(書籍)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같은 역사책에는 고구려(高句麗)에도 첨성대(瞻星臺)가 있었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고려(高麗)의 옛 수도였던 개성(開城)의 만월대(滿月臺) 근처에는 첨성대(瞻星臺)’라는 이름을 가진 건축물이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천문(天文) 기구(機具)를 설치한 간의대(簡儀臺=간의를 올려놓고 천문을 관측하던 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첨성대(瞻星臺)는 하늘을 관측(觀測)하는 천문대(天文臺)였으며, 이곳에서 일월 오성(日月五星)의 움직임을 관찰(觀察)했다고 합니다. 일월 오성(日月五星)이란 해와 달, 금성(金星), 목성(木星), 수성(水星), 화성(火星), 토성(土星)을 뜻합니다.

<참고>  문장에 나오는 지기삼사(知幾三事).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즉위(卽位=임금의 자리에 오름) 당시 예측(豫測)한 세 가지의 신비스러운 일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중국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太宗)이 선물로 보낸 모란꽃(牡丹) 족자(簇子=글씨나 그림 등을 표구하여 벽에 걸거나 두루마리처럼 말아 둘 수 있게 만든 물건), 나비가 없은 것을 보고 모란(牡丹)에 향기가 없음을 알아낸 것입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모란(牡丹)은 오늘날 한약재로 많이 이용하고 있는 작약 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모란(牡丹) 꽃은 향기가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작약은 꽃은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작약꽃을 한자어로 목단(牧丹)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모란(牡丹)은 목단(牧丹) 즉 작약꽃 아닌가 생각됩니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신라 선덕여왕의 발원으로 지었다는 절.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절에 장륙상(丈六像), 천왕상(天王像), 전탑(塼塔)의 기와는 승려 양지<良志>가 만들고, 현판도 그가 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경덕왕 23년에 다시 금박을 입혔는데 그때 비용으로 조() 이만 삼천칠백 섬이 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묘사(靈廟寺)는 조선 중종 10(1515)에 화재로 폐사<廢寺>되었습니다) 의 연못에서 겨울에 개구리가 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근곡(女根谷)에 백제군이 매복(埋伏=상대편의 동태를 살피거나 상대편을 불시에 습격하기 위해 적당한 곳에 몰래 숨어 있음)했음을 알아낸 것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자신이 죽을 날을 예측(豫測)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기록된 삼국유사(三國遺事) 끝부분에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료 출처=경주시 시설관리공단 천문대(天文臺) 안내문, 두피디아, 두산백과, 한국사 사전 1-유물과 유적, 법과 제도.

하루가 다르게 연두색 신록이 싱그러움을 더해가는 4월도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요즘은 연두색 신록과 더불어 아름답게 피어나는 봄꽃까지 그야말로 상춘(賞春客)들의 몸과 마음을 통통하게 살찌우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도 벌써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싱그러움을 더하는 연두색 신록처럼 얼마남지 않은 4월 잘 마무리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