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5월에 만난 경북 청도 읍성 싱그러운 작약꽃.
♣경상북도(慶尙北道) 문화재(文化財) 기념물(記念物) 제45호 청도읍성(淸道邑城).
경상북도(慶尙北道) 청도군(淸道郡) 화양읍(華陽邑)에 있는 조선 시대(朝鮮時代) 읍성(邑城)인, 청도읍성(淸道邑城)은 청도군청(淸道郡廳) 서쪽에 있는 화양읍(華陽邑) 내의 동상리(東上里)와 서상리(西上里) 일원(一圓=일정한 구역)에 있습니다. 주변에 화양읍사무소(華陽邑 事務所), 청도(淸道) 향교(鄕校)가 있습니다. 청도읍성(淸道邑城) 전방(前方=앞쪽)으로는 청도군(淸道郡) 각북면(角北面) 오산리(梧山里)의 비슬산(琵瑟山=해발 1,083m,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와 대구광역시 달성군 경계에 있는 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남동 방향(南東方向=동쪽과 남쪽 사이의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오산천(梧山川) 물이 유입되는 청도천(淸道川) 양쪽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집니다. 이 청도읍성(淸道邑城)은 지방에 살고 있는 읍민(邑民=읍에 사는 사람)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성(城)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청도읍성(淸道邑城)이 자리 잡은 현재의 화양읍(華陽邑)은 남고북저형(南高北低形=남쪽은 높고 북쪽이 낮은 지형), 동고서저형(東高西低形=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의 지세(地勢=땅표면의 생긴 모양)로서, 남쪽 가까운 곳에 진산(鎭山=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해 제사를 지내던 산)인 오산(鰲山=해발 550m)이 포함된 산괴(山塊=산줄기에서 따라 떨어져 있는 산의 덩어리)가 가로막고 있어 남쪽으로 도로가 통하기 어려운 형국(形局)입니다. 그래서 치소(治所=어떤 지역에서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를 감싸는 방형(方形=네모반듯한 모양)의 성곽(城郭=두 겹으로 쌓아 이루어진 내성과 외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지으면서 남문(南門)은 없고, 동문(東門)과 북문(北門), 서문(西門)만 있는 독특한 형태의 읍성(邑城)을 쌓아 놓았습니다.
또 청도읍성(淸道邑城)은 해발 100~122m의 구릉지(丘陵地=높이가 비교적 낮고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산으로 된 땅) 와 일부 평탄지(平坦地=평평하고 넓은 땅)에 돌로 축조(築造=쌓아서 만듦)된, 산성(山城=산 위에 쌓은 성)과 평지성(坪地城=평지에 둘러싼 성) 과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平山城=평지와 산을 이어서 쌓은 성)의 형태(形態=사물의 생김새나 모양)를 갖추고 있습니다.
청도읍성(淸道邑城)의 규모는 둘레가 약 1.9㎞, 높이가 1.7m 혹은 2.5m, 동쪽과 서쪽 간의 직선거리는 약 930m, 남쪽과 북쪽 간의 직선거리는 약 870m로 장방형(長方形=직사각형)입니다. 또 성(城)을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성(城)의 전체적인 모양은 네모난 모양으로 보입니다. 성벽(城壁)은 화양읍(華陽邑) 주변의 개천(開川=작은 하천이나 시내)과 산에서 채집한 자연석(自然石)을 이용해 쌓은 협축벽(夾築壁=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은 구조)을 이용했는데, 읍성(邑城) 축조(築造) 방법은 바닥에 잔자갈의 기초를 깔고 그 위에 접시처럼 납작한 지대석(址臺石=건축물이 세워지는 곳을 주위보다 조금 높이기 위해 쌓는 돌)을 1단(段)으로 놓은 후에 그 위에 성(城) 돌(성을 쌓는 데 쓰는 돌)을 올려놓았습니다.
성(城) 돌은 지대석(址臺石)보다 안쪽으로 약 20㎝가량 안쪽으로 배치하여 아래쪽 단(段)부터 위쪽에 있는 단(段)으로 올라가면서 작은 크기의 성(城) 돌을 거의 수직으로 쌓아 올려놓았습니다. 체성(體城=성벽의 몸체)은 가로 쌓기와 새로 쌓기를 교대로 허튼층쌓기(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에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를 했고, 중간에는 쐐기돌(돌을 쌓을 때, 돌과 돌의 틈에 박아서 물리는 돌)을 박아 구조성을 높여 놓았습니다. 체성(體城) 안쪽에는 흙 없이 돌로만 안쪽을 채워 놓았습니다. 잔존(殘存=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음) 상단(上段=위에 있는 단) 폭은 4~5m, 내단(內段=안쪽에 있는 단)은 완만한 경사의 비탈면으로 처리하여 쌓아 놓았습니다. 적대(敵臺=성문의 좌우에 설치된 방어 시설로, 성곽보다 높게 축조되어 적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역할을 한다)와 치성(雉城=성벽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바깥으로 돌출된 구조물로,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은 성벽의 몸체와 동시에 쌓았고, 쌓은 세부 방법은 성벽의 몸체와 동일한 방법으로 쌓아 놓았습니다.
청도읍성 작약꽃밭 옆에 화양읍 꽃밭에서 노닐다 식물원이 있습니다. 사진 속에 있는 기와집이 꽃밭에서 노닐다 식물원입니다.
성벽(城壁)은 안쪽과 바깥쪽에 돌을 쌓아 올리고 가운데는 토석(土石=흙과 돌)을 채워 다지는 내외협축(內外挾築) 방식으로 축조(築造) 되어 있습니다. 외성벽(外城壁)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는 시설인 여첩(女堞)을 쌓았으며, 성문(城門) 앞에는 성문(城門)을 보호하고 직진(直進)을 막기 위한 옹성(甕城)을 쌓았으며, 성문(城門)의 좌우(左右)에는 성벽(城壁)을 사각형 형태로 바깥으로 돌출시켜, 적이 성벽(城壁)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적대(敵臺) 혹은 치성(雉城)을 지어 만들어 놓았다. 읍성(邑城) 안에는 당연하지만, 여러 관청(官廳)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여지도(輿地圖=종합적인 내용을 담은 일반 지도. 역사적으로 조선 시대에 제작된 지도집으로, 세계 지도뿐만 아니라 조선 8도의 지도 등을 포함하고 있다)에 실린 청도읍성(淸道邑城) 그림지도에 따르면 성내(城內)의 관아(官衙) 건물로 객사(客舍), 아사(衙舍), 주홀헌(主笏軒), 제금당(製錦堂), 창고, 향청(鄕廳) 등이 대부분 읍성(邑城)의 남쪽 지역에 몰려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북쪽 성벽(城壁) 서단부(西端部=서쪽 끝부분) 저지대(低地帶)에는 각종 읍지에서 성내지(城內地)라고 하는 못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청도읍성(淸道邑城)을 쌓은 시기는 고려(高麗) 말에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옛 문헌(文獻)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청도읍성(淸道邑城)을 쌓은 시기는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내용을 보면 조선 시대(朝鮮時代)인 1589년 선조(宣祖=조선 제14대 왕) 22년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왜군(倭軍)의 침략을 예견하였고, 이러한 정세의 위급함을 조정에 알리자, 조선(朝鮮) 조정(朝廷=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나라의 정치를 의논하고 집행하는 곳)에서는 선조(宣祖) 23년인 1590년부터 영남과 호남의 주요 성읍(城邑=고을 또는 마을)에 성곽(城郭=내성과 외성)을 고치거나 새롭게 증축(增築=방이나 집 따위를, 이미 세워져 있는 건축물에 덧붙여서 더 늘려 지음)하기 시작했는데, 그 목적으로 부산(釜山) 동래(東萊)에서 한양(漢陽)에 이르는 주요 간선도로(幹線道路=도로망의 원줄기를 이루는 주요 도로)인 영남대로(嶺南大路)가 지나는 길목에 있는 청도(淸道)에도 읍성(邑城)을 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때 당시 왕명(王命=임금의 명령)에 따라 1590년 선조(宣祖) 23년에 군수(郡守) 이은휘(李殷輝)가 2년에 걸쳐 개축(改築=낡은 건물이나 허물어진 성(城)이나 담장 따위를 고쳐 짓거나 쌓음)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인 1591년에야 청도읍성(淸道邑城)이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592년인 선조(宣祖) 25년 음력 4월 13일 부산(釜山) 동래(東萊)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倭軍)은 영남대로(嶺南大路)를 따라 거침없이 북상하게 됩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7일 후인 1592년 음력 4월 20일에는 왜군(倭軍)이 청도(淸道)에 이르러 청도읍성(淸道邑城)을 손쉽게 함락시키고 성내(城內=성의 안쪽)의 관아시설(官衙施設=옛날에, 관리나 벼슬아치가 모여 나랏일을 처리하는 곳을 이르던 말) 과 동문(東門), 북문(北門), 서문(西門) 위의 누각(樓閣)을 불태우고 성벽(城壁)까지 파훼(破毁=깨뜨려 헐어 버림)하였습니다. 이렇게 청도읍성(淸道邑城)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군(倭軍)의 병화(兵火=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건물이 소실(燒失=불에 타 없어짐) 등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커다란 달 모양이 있는 곳이 청도읍성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청도읍성(淸道邑城)도 몇 차례 보수(補修=새로 고침)와 증개축(增改築=건물이 낡거나 허물어질 때 더 늘리거나 새로 짓는 것)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조선(朝鮮) 18대 왕인 현종(顯宗) 9년인 1669년 군수(郡守) 유비(兪秘)가 3개의 문(門)을 수리하고, 서문(西門)인 무회루(撫懷樓)와 북문(北門)인 공북루(拱北樓)를 새로 건축하였으며, 동문(東門)인 봉일루(捧日樓)는 조선(朝鮮) 제19대 임금인 숙종(肅宗) 34년인 1708년에 군수(郡守) 임정(林淨)에 의하여 세워졌고, 조선(朝鮮) 제22대 왕인 정조(正祖) 22년인 1798년에 동문(東門)인 봉일루(捧日樓)는 다시 중건(重建=보수하거나 고쳐 지음) 되었습니다. 3문(門)으로 유지되던 청도읍성(淸道邑城)은 조선(朝鮮) 제26대 왕인 고종(高宗) 7년인 1870년에 군수(郡守) 김이교(金履橋)가 남문(南門)인 진남루(鎭南樓)를 건축하므로 해서, 방형(方形=네모반듯한 모양)의 성곽(城郭)에 4개의 성문(城門)과 문루(門樓=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를 갖춘 전형적인 읍성(邑城) 형태(形態)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4개의 성문(城門)을 가진 석축(石築) 성벽(城壁)으로 둘러싸여 성내(城內)에 많은 관아(官衙) 건물과 민가(民家)가 어울려 있던 청도읍성(淸道邑城)의 경관(景觀)은, 일제(日帝)의 강압적인 읍성(邑城) 철거 정책에 의해 크게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인 1920년경 일제(日帝)가 성내(城內)에 동서로 도로를 넓혀 개설하면서, 4개의 성문(城門)과 성벽(城壁)이 부분적으로 철거되었고, 대부분의 관아(官衙) 건물도 객사(客舍)였던 도주관(道州館)과 군수(郡守)가 집무(執務=사무를 봄)하던 동헌(東軒)인 주홀헌(柱笏軒)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 대부분 건물은 훼철(毁撤=부수어서 걷어 치음)되었습니다. 성벽(城壁) 또한 무너진 채로 방치되다가 주민들에 의해 전답(田畓)으로 개척(開拓=산과 황무지를 일구어 밭을 만듦)되면서, 민가(民家)의 담장이나 심지어 밭둑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겨우 흔적만 남아 읍성(邑城)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폐고성(廢古城)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형(變形)과 훼손(毁損)에도 불구하고 청도읍성(淸道邑城)을 2003년과 2005년에 정밀 지표 조사(地表調査=어떤 지역 내에 있는 유물의 유무, 분포, 성격 따위를 파악하기 위해 땅 위에 드러난 유적. 유물을 훼손하지 않고 조사, 기록하는 일)가 실시되었으며, 이를 기본 자료로 삼아 2006년부터~2018년까지 총 9회에 걸쳐 발굴조사(發掘調査)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발굴조사(發掘調査)는 사방(四方=동, 서, 남, 북)의 성문(城門)과 주변의 성벽(城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발굴조사(發掘調査) 결과 성(城)의 구조적인 특징인 성벽(城壁) 체성(體城), 성문(城門) 앞의 옹성(甕城=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성), 성벽(城壁)을 바깥쪽으로 꺾어 내어 쌓은 치성(雉城=옛날에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이르던 말)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또 성벽(城壁)의 축조(築造)를 위한 기초 부분의 조성 방식도 밝혀졌습니다. 요철이 있는 지형을 평탄하게 다듬은 후 20~30㎝ 두께로 땅의 표면을 덮었으며, 그 위에 막돌과 흙을 다져 3단(段)을 만들어 기초부를 조성하였습니다. 성벽(城壁) 기초 부분의 폭은 약 610~1,020㎝로서 그 위에 쌓은 체성(體城)은 그 폭이 약 320~540㎝이기 때문입니다. 이밖에 성벽(城壁)의 견고성을 뒷받침하는 보조 시절도 찾아냈습니다. 성(城) 외벽(外壁) 바깥에는 기초로부터 230~250㎝까지 점토(粘土=찰흙)와 토석혼축(土石混築=흙과 돌을 섞어서 쌓음)으로 다짐한 3단(段)의 보축(補築=건물이나 구조물 따위를 보충하여 지음)을 만들었고, 성(城) 내벽(內壁)에도 토석혼축(土石混築)의 내탁부(성곽이나 건축 구조에서 내부를 지탱하거나 보강하는 부분)를 설치 했습니다. 이렇게 확인된 귀중한 정보는 그 후 청도읍성(淸道邑城)을 복원하는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청도읍성(淸道邑城)은 2006년부터~2022년까지 동문(東門)과 좌우(左右)의 동쪽 성벽(城壁), 북문(北門)과 문루(門樓)인 공북루(拱北樓) 및 좌우(左右) 성벽(城壁) 및 치성(雉城) 2곳, 서문(西門)과 무회루(撫懷樓) 및 인접 성벽(城壁), 그리고 북문(北門)과 서문(西門) 앞의 옹성(甕城) 등이 복원되어 점차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청도읍성(淸道邑城) 동쪽 성벽(城壁) 일부만, 1995년 1월 14일 경상북도(慶尙北道) 기념물(記念物) 제103호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 외 성벽(城壁)은 민가(民家) 및 경작지(耕作地) 등으로 인해 대부분 훼손(毁損)되어 간헐적(間歇的=일정한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는 것)으로 성벽(城壁)이 남아 있습니다.
청도군(淸道郡)에서는 2009년부터 매년 3월 청도읍성(淸道邑城) 밟기 행사를 개최합니다. 청도읍성(淸道邑城) 밟기 행사는 복원된 청도읍성(淸道邑城) 동문(東門)에서 북문(北門)까지 244m 구간에서 한 줄로 청도읍성(淸道邑城) 밟기를 행하고 있습니다. 청도읍성(淸道邑城) 밟기 행사는 부녀자(婦女子)들이 성곽(城郭) 위에 올라가 산성(山城)의 능선(稜線)을 따라 밟으며 줄을 지어 도는 풍속(風俗)으로, 액운(厄運)을 쫓고 무병장수(無病長壽)하며 극락왕생(極樂往生)한다는 전설(傳說)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옛날부터 청도읍성(淸道邑城)을 한 바퀴 돌면 건강해지고, 두 바퀴 돌면 오래 살고, 세 바퀴 돌면 소원성취(所願成就)한다는 유래(由來)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현재 청도읍성(淸道邑城) 안팎으로는 당시 지방 행정 시설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청도(淸道) 석빙고(石氷庫=보물 제323호), 청도동헌(淸道東軒=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03호), 도주관(道州館=경상북도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제207호), 청도 향교(淸道鄕校=경상북도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제207호), 청도 척화비(淸道 斥和碑=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09호) 등 당시 지방 행정 및 지역사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학술조사(學術調査) 결과, 청도읍성(淸道邑城)은 성벽(城壁), 치성(雉城), 적대(敵臺=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臺)), 문지(門址=성문이 있었던 자리 또는 그 흔적) 등이 확인되었습니다.☻자료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대구일보.
청도읍성 작약꽃밭은 작은 면적이지만 꽃은 다른 어느 지역의 작약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주 아름답고 싱그러움을 더하여 줍니다. 매년 이곳을 찾고 있지만, 작약꽃은 볼 때마다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길손의 마음을 울렁이게 합니다.
연두색 신록은 하루가 다르게 푸름을 더하고, 날씨 또한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점점 올라서며 서서히 초여름으로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5월도 중순을 넘어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5월이 저물기 전에 즐거움과 행복이 넘치는 추억도 많이 남겨 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