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세시 풍속 명절과 절기.

오늘은 24절기 중 8번째 절기인 소만(小滿)입니다.

풀꽃사랑s 2025. 5. 21. 10:31

소만(小滿) 절기는 보리와 밀 등 작은 열매가 작은 곡식의, 열매가 속이 차면서 익는다고 하지요. 올려놓은 사진은 경주시 황룡사지(皇龍寺址) 청보리밭 풍경입니다.

24절기 중 여덟 번째 절기 소만(小滿).

1년을 24개로 구분한 24절기 가운데 여덟 번째 절기인 소만(小滿)은 일곱 번째 절기인 입하(立夏)와 아홉 번째 절기인 망종(芒種) 사이에 오는 절기입니다. 24절기는 기본적으로 태양의 궤도(軌道)인 황도(黃道)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정해지므로 양력 날짜에 연동(聯動)됩니다. 소만(小滿)은 태양의 황경(黃經)60도인 날로 음력은 4, 양력은 520~21일에 들어 있습니다. 이때부터 햇볕이 강해지고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며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초여름의 기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또 대기 중의 공기가 불안정하여 한여름처럼 더워졌다가 비바람이 불고 기온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소만(小滿)’은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에 들어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보리와 밀 등 열매가 작은 곡식들이, 살이 가득 찬다고 하여 작을 소()’, 찰 만(滿)’자를 써서 소만(小滿)’이라고 합니다. 옛날 중국의 전통의학서(傳統醫學書)인 황제내경(黃帝內經=기원전 475~221)에 계절의 변화와 인간의 삶에 대해 언급된 이래,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舊唐書=945),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1281) 등 여러 문헌에 소만(小滿) 이후 15일을 5일간씩 나누어 삼후(三候)로 구분하고, 초후(初後)에는 씀바귀가 줄기를 키우고, 중후(中候)에는 봄나물인 냉이가 말라 죽으며, 말후(末候)에는 보리가 익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씀바귀는 꽃상추(=)에 속하는 다년초로서 뿌리나 줄기, 잎은 소만(小滿) 무렵에 식용으로 널리 쓰입니다.

소만(小滿) 기간에 대해 이런 묘사를 고려사(高麗史) 그리고 조선 초 이순지(李純之) 등이 펴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1444) 등 우리나라의 여러 문헌에도 인용되고 있는데, 중국 문헌에 기록된 절기는 옛날 중국 주()나라 때 화북(華北=지금의 화베이 지방으로 베이징과 텐진이 있는 지역) 지방의 기후가 바탕이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각 지역의 기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소만(小滿)에 전해지고 있는 풍속(風俗).

소만(小滿) 무렵에는 씀바귀 잎이나 뿌리를 채취하여 나물해 먹고, 이른 봄부터 자라온 냉이들은 고사(枯死=풀이나 나무 따위가 말라 죽음)합니다. 지난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보낸 보리 이삭은 익어서 누런색을 띠니 여름의 문턱이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조선 말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아들 정학유<丁學游>가 지었다는 가사(歌辭). 권농<勸農>을 주제로 농가에서 일 년 동안 해야 할 일을 달의 순서에 따라 노래하였다)“4월이라 맹하((孟夏=초여름) 되니, 입하(立夏), 소만(小滿) 절기로 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초여름은 소만(小滿) 무렵부터 시작되며 이때부터 날씨는 점점 더워지며 여름 기분이 나기 시작하며 초목들이 빠르게 성장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맹하(孟夏)는 초여름이라는 뜻인 이칭(異稱=달리 부르는 명칭)도 있습니다.

소만(小滿) 무렵 농촌에서는 본격적으로 농사일이 바쁘게 시작됩니다. 논을 갈아 물을 대어 모내기 준비를 하고, 모내기를 빠르게 시작하는 일부 지역에서는 이른 모내기를 하기도 합니다. 작년 가을에 파종하여 이삭이 누렇게 잘 익은 가을보리는 수확을 서둘러야 하며, 밭작물 모종도 심어야 합니다. 또 여러 가지 밭작물 김매기가 줄을 잇게 됩니다. 이른 봄에 파종한 봄보리가 성장하고, 산과 들녘의 초목들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농촌에서는 모내기 준비를 서두르고, 철쭉과 영산홍, 장미 그리고 작약꽃 등 붉은색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볍씨를 뿌려 모판을 만들면 모내기까지 모의 성장 기간이 40~50일 정도 걸렸으나, 요즘은 비닐 모판에서는 성장 기간이 40일 이내에 충분하게 모가 다 자라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 소만(小滿) 무렵에 모내기가 시작되어 일 년 중 제일 바쁜 계절로 접어들게 됩니다. 소만(小滿) 무렵이 되면 들녘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며 남부지방에서는 감자꽃이 피기 시작하고, 들녘에서는 청개구리의 정겨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뒷동산에서는 부엉이가 구슬프게 울어댑니다. 또 소만(小滿) 무렵이면 가을에 거둔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 수확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인 이 무렵은 보릿고개란 말이 있을 정도로 겨우내 먹어왔던 쌀이 떨어져 힘겹게 연명(延命=목숨을 근근이 이어감)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산과 들녘은 신록이 우거져 푸르게 변하지만, 대나무는 죽순(竹筍=대나무 뿌리에서 돋아나는 어린싹. 껍질에 싸여 있으며 요리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으로 모든 영양분을 내주고 누렇게 변합니다.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스럽게 키우는 어미의 모습을 보는 듯하고, 그 색이 봄철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나 가을 단풍 같다고 하여 죽맥(竹麥=새롭게 돋아난 죽순이 절정에 이르지만, 원줄기는 영양분을 빼앗겨 잎이 누렇게 변하는 현상), 추맥(秋麥=가을에 씨를 뿌렸다가 이듬해 초여름에 거두어들이는 보리) 이라고 합니다. 또 봄철에 누런 대나무를 가리켜 죽추(竹秋=깊어져 가는 봄에 대나무가 누렇게 변하고 시든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가을에 낙엽 지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죽추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라고도 합니다. 또 소만(小滿) 무렵이면 아카시아꽃이 만발하여 곳곳에서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하며, 해당화꽃과 쥐똥나무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경주시 황룡사지(皇龍寺址) 청보리밭 풍경입니다. 보리밭 건너에 보이는 건물은, 경주시에서 최근에 건축한 황룡사지 역사문화관입니다.

소만(小滿)에 먹을 수 있는 절식(節食).

소만(小滿) 무렵 비가 내린 후 새로 돋아난 죽순(竹筍) 채취하여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으면 그 맛이 담백하고 구수하여, 계절 음식 가운데 별미(別味=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특히 좋은 맛)로 치기도 합니다. 이밖에 냉잇국도 이즈음 별식(別食=평소에 먹던 것과는 다르게 만든 색다른 음식)이지만, 소만(小滿)이 지나 꽃이 피면 먹을 수 없게 됩니다. 또 향이 좋은 개똥쑥으로 쑥국을 끓여 먹었습니다. 보리는 소만(小滿)이 지나고 보름(15) 무렵인 절기 말후(末候)가 되면, 익기 시작하므로 밀과 함께 여름철 주식(主食=쌀이나 보리, 밀 등 끼니때마다 기본적으로 주요하게 먹는 음식)을 대표하는 음식입니다. 이밖에, 소만(小滿)에 먹을 수 있는 절식(節食)은 화전(花煎), 대추 떡이나 증편, 미나리파회, 어채(魚菜), 씀바귀와 죽순이 있습니다.

화전(花煎)은 음력 삼월 삼짇날(음력 33)에 즐겨 먹었던 진달래 화전(花煎)을 만들 듯이 노란색 장미꽃이나 식용 장미를 채취하여 화전((花煎)으로 부쳐 먹습니다. 소만(小滿) 무렵에 말린 대추를 올린 증편을 쪄서 먹었다는 옛 기록이 있는데, 요즘 추석 명절에 즐겨 먹는 증편은 소만(小滿) 풍속이 원조입니다. 막걸리를 이용한 증편은, 은은한 막걸리 향이 좋아 소만(小滿) 무렵의 건조하고 점차 더워지는 초여름 기후에 잘 어울립니다. 미나리파회는 데친 미나리를 파와 섞어 숙회(熟鱠=생선을 얇게 떠서 녹말을 묻혀 끓는 물에 데친 음식)를 만들고, 후추를 뿌린 간장에 찍어 먹으며 초여름 계절과 아주 잘 어울리는 음식입니다.

제철 생선회와 오이나물, 쪽파, 석이버섯, 데친 전복과 섞어 초고장과 버무린 후 달걀 지단과 잘 게 썬 국화 잎을 올려 먹는 어채(魚菜) 역시 소만(小滿) 무렵에 즐겨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소만(小滿) 무렵에 씀바귀를 먹으면 그해 여름 내내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다년초(多年草=한 번 심으면 여러 해에 걸쳐 계속 돋는 풀. 가을에 땅 위의 부분이 말라 죽어도 뿌리나 땅속줄기가 살아남아 해마다 봄이면 줄기와 잎이 다시 돋아난다)인 꽃상추 과()에 속하는 씀바귀는 생뿌리와 잎을 생체나 장아찌를 해서 즐겨 먹습니다.

어채(魚菜)는 생선 살과 여러 가지 채소에 녹말을 묻혀 끓는 물에 데친 우리나라 전통 요리 중의 하나입니다. 맛이 깔끔하고 향이 좋으면서도 색감이 훌륭해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궁중(宮中)의 주안상(酒案床)에 빠지지 않고 올랐습니다. 어채(魚菜)를 만들 때는 비린내가 나지 않고 맛이 담백한 민어, 광어, 도미, 송어 등의 생선과 버섯류, 채소류 등의 재료를 추가하며, 전복, 해삼 등의 해산물도 함께 준비합니다. 어채(魚菜)는 보통 양념 초고추장이나 겨자즙에 찍어 먹는데, 이는 새콤달콤한 맛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고단백 저지방 식품인 생선을 주요 재료로 쓰며, 여기에 항산화 성분이 풍부한 채소가 가미돼 현대인들에게도 건강식으로 적극 추천할 만한 요리입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소스 개발과 상차림으로 어채(魚菜)의 맛과 멋을 더하면 한국전통음식(韓國傳統飮食)의 세계화에도 어채(魚菜)가 충분히 이바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채(魚菜)는 화려한 고급 음식으로, 궁중(宮中) 잔치를 기록한 의궤(儀軌=조선 시대, 왕실이나 국가 행사가 끝난 후에 논의, 준비 과정, 의식 절차, 진행, 행사, 논공행상 등에 관하여 기록한 책)나 양반가문(兩班家門)에서 전해 오는 옛 조리서에 주로 남아 있습니다.

소만(小滿) 무렵이 되면 장마가 시작되지 않은 초여름 날씨로 대개 건조한 기후를 보입니다. 또 가뭄이 심하게 들기도 해 옛날부터, 가뭄을 대비해 저수지나 논에 물을 가두어 두고 모내기 준비를 합니다. 이와 반대로 남해안 지방은 비가 잦고 때로는 초여름 장마기에 접어들기도 합니다. 또 소만(小滿) 절기에는 기후변화가 심하여, 한여름 기온을 보이다가도 삽시간에 차고 쌀쌀한 비바람이 불어온다고 하여 소만(小滿) 바람에 설늙은이(나이는 별로 많지 않으나 기질이 매우 노쇠한 사람)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俗談)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료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 백과, 한국 세시풍속 사전, 인터넷 검색(글이랑 글책연구소).

청보리밭 넘어 울창한 숲이 우거진 안쪽에 분황사가 있습니다.

경주(慶州) 황룡사지(皇龍寺址).

황룡사(皇龍寺)는 경주 중심부에 있는 고대 신라시대의 최대 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眞興王) 14년인 553년에 월성(月城)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宮闕)을 조성하다가,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여 17년 만에 완성하고, 절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고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진흥왕(眞興王) 35574년에 높이가 5m가 넘는 주존불(主尊佛)인 금동삼존불(金銅三尊佛)을 만들고, 신라 제26대 왕인 진평왕(眞平王) 6년인 584년에 금동삼존불(金銅三尊佛)을 모시기 위해 금당(金堂=절에서 본존, 즉 석가모니불을 모셔 두는 건물)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금동삼존불상(金銅三尊佛像)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삼존불상(三尊佛像)을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황금(黃金)과 황철(黃鐵)을 배에 실어 보냈는데, 이 재료로 신라에서 금동(金銅) 삼존불(三尊佛)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 12년인 643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慈藏), 신라의 위용을 보여 줄 수 있는 거대한 구층탑(九層塔)을 세워 외적(外敵)의 침입을 막을 것을 건의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에 따라 백제 기술자인 아비지(阿鼻旨)를 불러 공사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황룡사(皇龍寺) 구층목탑(九層木塔)을 완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인 645년에 구층목탑(九層木塔)을 건립하면서 황룡사(皇龍寺)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황룡사(皇龍寺)493년에 걸친 대규모 국가사업으로 완성된 사찰(寺刹)입니다. 이후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대에는 황룡사(皇龍寺) 대종(大鐘)이 완성되었습니다.

황룡사(皇龍寺)에는 신라 삼보(三寶=신라 왕실의 권위와 호국을 상징하는 세 가지 보물.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하늘로부터 받았다는 허리띠>, 진흥왕(眞興王) 대의 황룡사(黃龍寺) 장육존상(丈六尊像=사람의 키를 보통 8(184)이라 하는데 그 배수인 16(386)의 크기로 만든 불상. 16척이 16=<4~5m>이므로 장육(丈六)이라 부른다), 선덕여왕(善德女王) 대의 황룡사(皇龍寺) 구층목탑<九層木塔>) 가운데 두 개가 황룡사(皇龍寺)에 있을 정도로, 황룡사(皇龍寺)는 신라를 상징하는 큰 사찰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왕실의 사원(寺院)을 관리하던 관청인 성전(成典=신라 때, 사찰의 운영을 맡아보던 관청)이 설치될 만큼 황룡사(皇龍寺)는 국가 관리 사찰로, 호국사찰로 위상이 높았습니다.

황룡사(皇龍寺)는 중문(中門)과 목탑(木塔), 금당(金堂), 강당(講堂=불교 경전을 강론하는 방)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일탑식(一塔式) 배치하였으나, 금당(金堂)의 좌우에 작은 금당(金堂), () 좌우에 경루(經樓=불경을 보관해 두는 누각)와 종루(鍾樓=종을 매달 맨 누각)를 대칭으로 배치되는 1 (), 3 금당(金堂)식으로 바뀌었다. 주위 사방을 회랑(回廊=종교 건축이나 궁전 건축 따위에서 건물의 중요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달린 복도)으로 둘렀습니다. 황룡사(皇龍寺) 구층목탑(九層木塔)은 낙뢰(落雷=벼락)와 같은 사고가 있을 때마다 고쳐 지었는데, 고려 제23대 왕인 고종(高宗) 25년인 1238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황룡사(皇龍寺)와 함께 불타 없어졌으며, 지금은 옛터만 남아있습니다.

1976년부터 8년 동안 황룡사皇龍寺) 옛터를 발굴한 결과 원래 늪지대(진흙으로 된 바닥에 얕은 물이 늘 고여 있어 수생 식물이 많이 자라는 질퍽한 지대. 보통 호수보다는 작고 연못보다는 면적이 넓다)였던 곳을 절터로 만들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4만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유물 가운데 높이 182의 대형 치미(鴟尾=고대 목조 건축물에서 용마루의 양쪽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 기와)는 황룡사(皇龍寺) 건축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출처-경북 경주시 황룡사지 현지 안내문을 참고로 하여 새롭게 편집.

황룡사(皇龍寺) 역사문화관(歷史文華館).

황룡사(皇龍寺) 역사문화관(歷史文華館)은 황룡사지(皇龍寺址) 서쪽에 위치하여 황룡사(皇龍寺)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관람객들이 체험하는 역사 체험장의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건립되었습니다. 황룡사(皇龍寺) 역사문화관(歷史文華館)1층은 전통 건축물의 기단을 형상화하고, 2층은 한옥 요소와 동기와 지붕으로 표현하여 천년고도 경주의 이미지를 연출하였습니다. 주요시설은 황룡사(皇龍寺) 구층목탑(九層木塔) 1/10 모형, 3D 영상실, 신라 왕경 파노라마, 야외 전망대 등이 있습니다. 목탑 전시실은 경관 조명을 설치하여 내, 외부를 관람할 수 있으며, 8m의 목탑모형으로 황룡사(皇龍寺)의 상징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3D 영상은 황룡사(皇龍寺) 창건 553년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 14년부터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으로, 황룡사(皇龍寺)가 소실(1238년 고려 제23대 왕인 고종(高宗) 25) 되기까지의 역사를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출토 유물 복제품 발굴조사 내용 연구성과 등을 전시하여, 경주 황룡사지(慶州 皇龍寺址)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출처-경북 경주시 황룡사지 역사문화관 안내문.

분황사(芬皇寺) 보광전(普光殿)입니다.

첫 번째 사진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9호인 분황사 석정(石井=안쪽 둘레를 돌로 쌓은 우물)입니다.

신라의 석탑(石塔)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30호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입니다.

분황사 천지인실상탑(天地人實相塔)입니다.

경주(慶州) 분황사(芬皇寺).

분황사(芬皇寺)는 신라 제27 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인 634년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法燈=부처 앞에 올리는 등불)을 이어온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분황사(芬皇寺) 창건 직후에는 당대(當代=일이 있는 바로 그 시대)의 명승(名僧=학식이나 덕행이 높기로 이름이 난 승려)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 신라시대 고승)와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 신라시대 고승)가 주석(駐錫=승려가 한때 어떤 지역에 포교하기 위하여 머무는 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분황사(芬皇寺)에는 솔거(率居=신라를 대표하는 화가)가 그렸던 관음보살(觀音菩薩=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 벽화와 신라제 35대 왕인 경덕왕(景德王) 14년인 755년에 강고내말(强古乃末)이 구리(=) 306,700()=184,020)으로 주성(鑄成=녹인 쇠붙이를 거푸집에 부어 물건을 만드는 일. 주물<鑄物>)하였던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에서 구원해 준다는 부처) 등이 있어 사격(寺格=절의 자격이나 등급)을 높였습니다.

분황사(芬皇寺)는 당간(幢竿)과 지주(支柱), 중문(中門), 석탑(石塔), 삼금당(三金堂=절의 대웅전, 부처님을 모신 법당), 강당(講堂=강연이나 강의, 의식 등의 여러 행사를 치르는 건물이나 ), 회랑(回廊=종교 건축이나 궁전 건축 따위에서 건물의 중요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달린 복도)을 갖춘 대가람(大伽藍=규모가 큰 절)이었으나, 고려시대(高麗時代) 23 대왕인 고종(高宗) 25년인 1238년에 몽골침입과 조선왕조시대(朝鮮王朝時代)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차례로 겪으면서 대부분 전각(殿閣=사찰)이 소실(燒失=불에 타서 없어짐)되어 버리고, 조선 제15대 왕인 광해군(光海君) 원년(元年=첫 번째 해)1609년에 중창(重創=낡은 건물을 고쳐서 다시 새롭게 지음)한 보광전(普光殿=약사유리광여래를 모신 법당)과 새로 주조(鑄造=녹인 쇠붙이를 거푸집에 부어 물건을 만드는 일, 똑같은 뜻을 지닌 용어로 주성<鑄成>, 주물<鑄物>)한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入相)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19호 등이 사역(寺域=절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 안) 을 지키고 있습니다.

현재 분황사(芬皇寺) 경내(境內=일정한 지역이나 경계의 안)에는 신라의 석탑(石塔)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30호 모전석탑(模塼石塔), 원효대사(元曉大師)의 비석(碑石=무덤에 묻힌 사람의 아름 및 행적을 나타내거나 어떤 사적이나 업적 또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돌에 글을 새겨서 세우는 것)을 세웠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부(和諍國師碑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인 구황동(九黃洞) 당간지주(幢竿支柱),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9호인 신라호국룡(新羅護國龍)의 설화(說話=어느 민족이나 집단에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안쪽 둘레를 돌로 쌓은 우물) 등의 석조문화재(石造文化財)가 남아있습니다. 출처-경북 경주시 분황사 현지 안내문을 인용하여 새롭게 편집.

경주(慶州) 분황사(芬皇寺) 모전석탑(模塼石塔).

경주(慶州) 분황사(芬皇寺) 모전석탑(模塼石塔=벽돌탑을 모방한 석탑. 돌을 벽돌 모양으로 가공하여 쌓거나 모서리 기둥을 생략하고, 지붕돌의 윗면을 계단식으로 만든 석탑)은 신라 제27 대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인 634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입니다. 흑회색의 안산암(安山巖=화산암의 하나. 대부분 작은 결정으로 되어 있고 널 모양 또는 기둥 모양의 규칙적인 결이 있다. 사장석, 감섬석, 흑운모, 휘석 등을 함유하며, 건축 및 토목 재료로 쓰인다.)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입니다. 지금은 3층이지만 원래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15년에 일본인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모전석탑(模塼石塔)을 수리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닥 돌은 자연석으로 널찍하게 쌓았고 네 모서리에 사자상을 두었습니다. 1층은 면보다 화강암으로 문을 만들고 문양 쪽에 금강역사-(金剛力士像=석굴암 주실 입구에 좌우에 있는 수문신장. 악의 무리가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수문장의 역할을 한다)2구씩 비치해 놓았습니다. 2층과 3층은 높이가 현격히 줄었고, 지붕은 아래위 쪽 모두 계단식으로 쌓아 놓았습니다. 탑 꼭대기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연꽃 장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1915년에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돌 사리함(舍利函=사리 또는 불제자<佛弟子>나 성승<聖僧>의 유골을 넣는 용기. 불탑 안에 넣어 두었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사리함에는 녹 유리 조각, 구슬, 가위, , 은 바늘과 은함(銀菡), 숭녕통보(崇寧通寶=중국 송나라 8대 임금인 휘종 때 발행된 동전<화폐>),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중국 한나라 한무제<漢武帝> 때 쓰던 동전), 등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발견된 동전(銅錢=구리나 은 또는 니켈 등의 금속을 섞어서 만든 동그랗게 생긴 돈을 통틀어 이르는 말)으로 보아 고려(高麗) 15대 왕인 숙종(肅宗)에서, 고려 제16 대왕인 예종(睿宗) 때인 12세기(1105~1122) 초에도 탑을 수리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돌사리함(舍利函)에는 타이완, 오키나와 등지에서 서식(棲息=생물이 어떤 일정한 환경에 깃들여 삶)하는 조개의 껍데기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 신라의 대외 교역에 대한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출처-경북 경주시 분황사 현지 안내문을 인용하여 새롭게 편집.

소만(小滿) 무렵이 되면 장미, 작약 등 붉은 꽃이 핍니다. 사진은 청도읍성 작약꽃밭 풍경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초여름은 소만(小滿) 무렵부터 시작됩니다. 소만(小滿)지나면 날씨는 점점 더워지며 여름 기분이 나기 시작하며, 초목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농촌에서는 모내기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들녘에는 지난가을에 파종한 보리들이 누렇게 익기 시작합니다. 또 장미와 작약꽃 등 붉은색 꽃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요즘 하루가 다르게 초목들은 싱그러움을 더해가고, 들녘에서는 정겨운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5월 하순입니다. 즐거움과  행복이 넘치는 수요일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