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의 만남

경북 의성군 조문국 사적지와 문익점 면작기념비(棉作記念碑).

풀꽃사랑s 2025. 6. 2. 09:49

사진 속 원형 모양의 회색 돔 모양의 지붕을 한 고분(古墳)은 경주시 대릉원에 있는 천마총(天馬塚)처럼 고분(古墳) 내부를 볼 수 있게 해 놓은, 의성군(義城郡)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 전시관(展示館)입니다.

의성군(義城郡) 조문국(召文國) 사적지(事蹟地)에서도 경주시 대릉원에서 볼 수 있는 대형고분(大形古墳)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대리리(大里里) 조문국 사적지(召文國 史蹟地).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대리리(大里里) 221-4번지(番地)에 있는 조문국(召文國) 사적지는, 삼한시대(三韓時代=우리나라 남쪽에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는 부족 국가가 존재했던 시대) 부족 국가(部族國家)였던 조문국(召文國)의 흔적을 간직한 역사적 장소입니다. 이곳에는 조문국(召文國)의 왕인 경덕왕릉(景德王陵)을 비롯한 고분군(古墳群)과 유물을 전시한 고분전시관(古墳展示館)이 자리 잡고 있으며, 계절마다 다양한 꽃들이 만개해 이곳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의 발길을 끄는 명소로 유명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봄에는 유채꽃과 모란(牡丹), 작약꽃이 아름답게 피고, 여름에는 백일홍(百日紅), 가을에는 국화(菊花)꽃이 아름답게 핍니다. 요즘은 붉은 작약꽃이 만개하여 이곳을 찾는 길손의 마음을 울렁이게 합니다. 조문국 사적지(召文國 史蹟地) 내에는 조문정(召文亭) 전망대가 있어 사적지(史蹟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으며, 최근에 조문정(召文亭) 전망대를 전면 보수하여 더욱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문국 사적지(召文國 史蹟地) 정문 쪽 의성 탑리(義城塔里) 간 국도변(國道邊) 근처에 문익점 면작기념비(文益漸 綿作紀念碑)와 문익점 면작기념비(文益漸 綿作紀念碑) 안내석(案內石)이 세워져 있습니다.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고분군(古墳群) 분포(分布=여러 곳에 널리 퍼져 있음)와 현황(現況=현재 상황).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고분군(古墳群), 경상북도(慶尙北道) 내륙(內陸) 중앙부(中央部)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낙동강(洛東江)에서 직선거리로 30km 떨어진 쌍계천 상류 금성산(金城山)자락에 있습니다. 금성산(金城山 해발 531m) 서쪽 자락의 모지산(舊知山, 해발162.6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과 그 사면(斜面=경사진 면)4~6세기 신라시대(新羅時代)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총(古塚=오래된 무덤)들이 분포(分布)하고 있습니다. 2022년 국가 지정문화제 사적 제155호로 승격된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고분군(古墳群)은 현재 행정구역상 의성군 대리리(大里里), 탑리리(塔里里), 학미리(鶴尾里)로 구분하고 있지만, 하나의 산 능선에 연이어서 조성된 대규모의 고분군(古墳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대리리(大里里) 구역은 남북 방향의 중앙선 철도 서쪽에 해당합니다.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중형(中形) 고분(古墳)인 지름 10~15m, 높이 1~1.5m의 고분(古墳)들이 주로 분포(分布)하고, 그 북쪽 사면(斜面)에 대형(大形) 고분(古墳)인 지름 20m 전후(前後), 높이 3~5m가 되는 고분(古墳)이 여러 기()가 있습니다. 원대리 마을 쪽으로 뻗은 여러 구릉(丘陵=산보다는 조금 낮고 완만하게 비탈진 곳)에는 40여 기()의 중대형(中大形) 고분(古墳)이 확인되는데, 규모가 큰 것은 지름 20~30m, 높이 3~5m 정도이며, 작은 것은 지름 10~15m, 높이 1m 내외인 고분(古墳)이 분포(分布)하고 있습니다. 대리리(大里里) 2, 3, 5호 고분(古墳)은 발굴되었습니다.

탑리리(塔里里) 구역은 탑리(塔里) 4리 경애원 북쪽 산꼭대기(해발 150.5m)에 지름 20~30m, 높이 3~5m 대형(大形) 고분(古墳) 6~7기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북서쪽으로 뻗은 능선에는 지름 20m 전후의 중대형(中大形) 고분(古墳)들이 확인되며, 사면(斜面)에는 지름 10~15m 이하의 중소형(中小形) 고분(古墳)들이 분포(分布)하고 있습니다.

학미리(鶴尾里) 구역은 행정구역상으로 학미리(鶴尾里)에 해당하지만, 탑리고분(塔里古墳) 동쪽 구역과 대리리(大里里) 북쪽 구역으로 구분됩니다. 탑리고분(塔里古墳) 동쪽 산꼭대기 해발 162.6m를 중심으로 지름 10~15m, 높이 3m 전후의 중형고분(中形古墳)과 지름 5~10m, 높이 1m 정도의 소형고분(小形古墳)이 확인되며, 지표상(地表上=땅의 겉면)에 노출(露出=겉으로 드러나거나 드러냄)되어 내부 관찰이 가능한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주검이 든 관을 운반하기 위한 지면(地面), 수평으로 판 널길. 관을 넣는 널방으로 이루어진 무덤) 2기가 있다. 학미리(鶴尾里) 1, 2, 3 고분(古墳)은 발굴되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 제17 대왕 인종 1145년에 김부식(金富軾)이 기전체(紀傳體)로 엮은 5010책의 사서(史書). 신라, 고구려, 백제의 정사(正史)로 왕실 중심으로 기록되었으며, 고려 중기의 승려 학자인 일연(一然) 스님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서(史書)이다) 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일원에 있었던, 조문국(召文國), 신라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2(185)에 신라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編入)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의 고분(古墳)은 대개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60년 탑리리(塔里里) 고분군(古墳群)부터 2020년 대리리(大里里) 고분(古墳)까지, 금성면(金城面) 고분군(古墳群)에서는 총 9회에 걸쳐 발굴조사(發掘調査)가 이루어졌습니다.

지표(指標=어떤 사물의 목적이나 기준이 되는 표적이나 표지)조사(調査) 결과에 따르면 이 일대는 조문국(召文國) 경덕왕릉(景德王陵)이라 전해지는 고분(古墳)을 포함해 약 374기의 고분(古墳)이 분포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또한 발굴조사(發掘調査) 결과 의성(義城) 금성면(金城面) 고분군(古墳群) 형성 과정은 목관(木棺), 목곽묘(木槨墓=관을 넣어 두는 널방을 나무로 만든 무덤. 북한 평양 부근의 낙랑 고분, 경주 부근의 신라 고분이 이에 속한다) 에서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돌무지덧널무덤으로 덧널의 위를 사람 머리 크기의 자갈로 덮어 쌓고 흙을 덮은 무덤. 옛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돌방무덤으로, 주검이 든 관을 운반하기 위한 지면(地面), 수평으로 판 널길. 관을 넣는 널방으로 이루어진 무덤) 등 옛날 신라 지역인 지금의 경주 지역에서 확인된 고분(古墳)의 형태가 모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돌무지덧널무덤이 단발적으로 형성된 것과 달리, 이곳에서는 대규모의 고분(古墳)이 지속해서 축조되었다는 점과 유사 돌무지덧널무덤이 금성면(金城面)의 주요한 묘()의 형태라는 점은, 그때 당시 의성(義城)의 세력이 매우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굴조사(發掘調査) 결과 확인된 유물의 다수는 의성 양식 토기이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주관한 탑리(塔里) 1호 고분(古墳) 내부의 발굴조사(發掘調査)에서 금동관(金銅冠), 금동 장식, 은대과대, 금동식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성림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대리리 46호 고분, 47호 고분, 48호 고분, 49호 고분)에서는 금동관모, 팔뚝 가리개, 금동 과대, 삼엽환두대도, 은제관식, 의성 양식 토기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일대는 오랫동안 조문국(召文國)의 도읍지(都邑地=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중심이 되는 땅)였습니다. 대규모 고분(古墳)의 축조 수준 높은 위세품(威勢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금성면(金城面) 고분군(古墳群)에 묻힌 조문국(召文國)” 지배자들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강력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해서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부지역(北部地域)의 최대 세력으로 군림(君臨=어떤 분야에서 절대적인 능력이나 세력을 가지고 남을 압도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조문국(召文國) 사적지에는 5,500(1,660) 면적에, 14천 그루의 작약꽃밭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매년 작약꽃이 필 무렵이면 많은 상춘객이 전국에서 찾아옵니다. 특히 경상북도 북부지방인 의성은 옛날부터 한약재로 이용하고 있는 작약재배 주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현재도 많은 농가에서 넓은 면적에 작약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자료 출처=의성군 관광 안내. 의성 조문국 박물관.

우리나라 토종 야생화 메꽃입니다. 꽃송이가 나팔꽃과 비슷하여서 나팔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팔꽃과 메꽃은 전혀 다른 식물입니다.

의성군(義城郡) 조문국(召文國)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 전시관(展示館)입니다.

조문국(召文國) 고분(古墳) 전시관(展示館).

경덕왕릉(景德王陵) 앞에는 봉분(封墳) 모양의 조문국(召文國) 고분(古墳) 전시관(展示館)이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대리리(大里里) 351번지(番地)입니다. 20095월부터 20109월까지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慶尙北道文化財硏究院), 현재 경북문화재단(慶北文化財團) 문화재연구원(文化財硏究院)에서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에 대한 발굴조사(發掘調査)가 이루어졌으며, 발굴조사(發掘調査)가 끝나 그 자리에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의 내부 모습을 재현하여 고분전시관(古墳展示館)으로 조성해 놓았습니다. 고분전시관(古墳展示館) 내부에는 인골(人骨=사람의 뼈)과 토기, 장신구 등의 출토 유물과 출토 상태, 순장 문화(殉葬 文化=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그의 아내나 신화 또는 종들을 함께 매장하였던 고대 장례 풍속 문화) 등을 통해 당시의 매장 풍습(埋葬 風習=고대 장례문화와 풍습)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은 중대형(中大形) 고분(古墳)에 해당하며, 봉분(封墳)의 봉토(封土=흙을 쌓아 올린 무덤의 흙)는 평면 원형(흙을 쌓아 올린 봉분(封墳)은 위에서 보았을 때 둥근 모양(圓形)에 가까운 형태)에 가깝고, 고분(古墳)의 크기는 지름 30m 내외, 높이가 7m 정도 됩니다. 외형(外形=겉으로 드러난 모양)1개의 봉분(封墳)이지만 무덤의 주인은 2명인 것으로, 발굴조사(發掘調査)로 알려졌습니다. 2호 고분(古墳)의 봉분(封墳) 내에서는 12, 봉분(封墳) 주변에서 2, 등 총 14기의 유구(遺構=고고학적 구조물이나 흔적)가 조사되었습니다. 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무덤에서 실제로 시신이 안치된 공간을 의미)의 형태나 묘곽(墓槨=무덤 안에 있는 관을 감싸는 일종의 보호 시설)의 구조 양상(構造樣相=묘곽의 형태적 특징과 배치 방식), 출토유물(出土遺物)의 공반관계(共伴關契=함께 출토된 유물의 연관성)로 보아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5세기 이후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고분(古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에서는 총 732점의 유물(遺物)이 출토(出土)되었습니다. 출토유물(出土遺物)은 도기(陶器=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리거나 약간 구운 다음, 유약을 발라 다시 구운 그릇. 검붉은 윤이 나고 단단하다)와 토기(土器 원시 시대에 쓰던, 흙으로 만든 그릇. 모양, 무늬 따위로 민족과 시대의 특색을 나타낸다. 진흙으로 만들어 유약을 바르지 아니하고 구운 그릇) 555, 옥석류(玉石類=옥과 관련된 유물) 5, 금속류(金屬類) 172점 등 모두 732점의 유물이 출토(出土)되었습니다. 출토 양상(出土樣相=고고학에서 유물이 발굴될 때의 상태나 형식을 뜻함. 쉽게 말해, 유물이 땅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견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을 살펴보면, 주곽(主槨=한 무덤 안의 여러 곽 가운데 중심이 되는 인물의 주검을 넣은 곽) 이거나 단독곽(單獨槨=독립된 하나의 매장 공간)인 경우는 한쪽 단벽(무덤의 한쪽 벽면) 또는 양 단벽(무덤의 양쪽 벽면) 아래에 유물을 매납(埋納=시신을 매장할 때 여러 가지 물건을 함께 묻어 바침)하여 놓았습니다. 부곽(副槨=으뜸 덧널에 딸려 있어 대개 껴묻을 거리를 넣어 두는 곳)의 경우는 내부 공간을 순장자(殉葬者=한 집단의 지배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뒤를 따라 강제로 또는 자진하여 산 채로 함께 묻힌 사람)의 공간과 유물부장(遺物副葬=무덤 안에, 평소에 고인이 쓰던 물건을 함께 묻는 행위) 공간으로 나누어 놓았고, 그 사이에 금속류를 부장(副葬=무덤 속에 물건을 함께 묻는 행위)하여 놓았습니다. 자료 출처=경북 의성군 조문국 박물관.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의 내부 구조.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 내부(內部)에 있는 처음 만들어진 1A봉토(封土=시신을 매장한 후 그 위에 흙을 덮어 쌓아 올린 흙무더기) 에서 무덤 구조를 발굴(發掘)한 결과, 봉토(封土) 내부(內部)에는 총 4기의 유구(遺構)가 확인되었습니다. 이 중 1호 유구(遺構=고고학적 구조물이나 흔적) 중심이 되는 본래의 유구(遺構)인 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무덤 안에서 시신 혹은 주요 인물이 실제로 묻혀 있는 중심 공간)이고, 그 외에 북서쪽에 목곽묘(木槨墓=나무로 짠 관을 넣은 무덤) 1(4), 남동쪽에 목곽묘(木槨墓) 2(2호와 3) 등 총 4기가 확인되었습니다. 4기의 유구(遺構) 구조는 모두 같은 땅의 높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높이에 위치하도록 따로따로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1호 유구(遺構)는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의 주인공이 묻힌, 중심 유구(遺構)인 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 2호 유구(遺構)의 중앙에서 동쪽으로 조금 치우쳐 조성되었습니다. 유구(遺構)는 위에서 보면 11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두 개의 곽(=관이 들어가는 공간)이 나란히 놓인 형태입니다. 유구(遺構)는 주곽(主槨=중심 공간)과 부곽(副槨=보조 공간)이 함께 있는 구조로 주곽(主槨=중심이 되는 관이 놓인 공간)은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외부에 돌을 쌓고 그 안에 나무곽을 넣은 무덤), 부곽((副槨=부장품이나 보조 시신 등이 들어가는 공간) 목곽묘(木槨墓=그냥 나무곽으로만 구성된 무덤) 되어 있습니다.

B 봉토(封土)는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2차 봉토(封土)입니다. 2차 봉토(封土) 내부(內部)에서 무덤 구조를 발굴(發掘)한 결과, 봉토(封土) 내부(內部)에는 총 7기의 유구(遺構)가 확인되었습니다. 주요 유구(遺構)는 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1) 외에도 B 봉토(封土)의 동쪽 부분에 집중해서 분포(分布)하고 있으며, 북동쪽에 목관묘(木棺墓) 2(2~3)와 제사유구(祭祀遺構) 1(6), 남동쪽에 옹관묘(甕棺墓=항아리를 관(관으로 사용한 용기)으로 삼아 시신을 매장한 무덤 형태) 1(4), 남서쪽에 제사유구(祭祀遺構) 1(5), 이렇게 총 7기의 유구(遺構)가 확인되었습니다. 유구(遺構)는 동일한 수평 레벨(바닥이 같은 높이)이 아닌 각기 다른 위치에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1호 유구(遺構)는 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로 주곽(主槨=중심 공간)과 부곽(副槨=보조 공간)이 함께 있는 구조이며, 주곽(主槨)은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의 중심에, 부곽(副槨)은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의 서쪽에 치우쳐 자리 잡고 있습니다. A봉토(封土)의 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와 같이 주곽(主槨=중심이 되는 관이 놓인 공간)은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외부에 돌을 쌓고 그 안에 나무곽을 넣은 무덤), 부곽(副槨=부장품이나 보조 시신 등이 들어가는 공간) 목곽묘(木槨墓=그냥 나무곽으로만 구성된 무덤)로 되어 있습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유물.

. 재갈(말을 부리기 위해 말 입구에 몰리는 도구) 다른 이름으로 함(), 마함(馬銜)이라고도 합니다. 제작 연대는 삼국시대이며 재질은 철이고, 길이는 14.4입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에서 출토되었으며, 재갈 쇠 멈춤 띠인 함유(銜留)는 남아 있지 않아 종류를 알 수 없습니다. 철로 만든 재갈 쇠 함(), 고삐 이음새인 인수(引手), 굴레 연결부인 입문용금구(立聞用金具)로 구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 신라토기(新羅土器).

신라가야(新羅伽倻) 토기(土器)는 섭씨 1천도 이상에서 구웠기 때문에 쇠붙이같이 단단한 도기(陶器=질그릇)입니다. 제작 기술은 회전판을 이용하는 것에서부터 점차 물래 사용이 보편화되어 발전했습니다. 유약(釉藥=도자기를 구울 때, 그 겉면에 바르는 약)은 씌우지 않았으나 겉면이 유약(釉藥)을 입힌 것 같이 반들거리는 것은, 높은 열에 의해 태토(胎土=도자기를 만드는 원료가 되는 흙) 속의 규산(硅酸=규소, 산소, 수소의 화합물인 약한 산. 유리를 만드는 데 사용)이 유리질화(琉璃質化=투명하고 균질한 비결정질의 상태로 변환하는 일)되었기 때문이다. 형태는 굽다리접시인 고배(高杯), 긴목항아리 장경호(莊頸壺), 이형토기(異形土器=삼국시대에 인물, 동물, 집 따위와 같은 특정한 기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토기) 등에서 가장 큰 특징을 보인다.

특히 굽다리접시는 굽다리의 투공(透孔=토기의 굽에 뚫린 구멍)이 어떤 모양으로 뚫렸는가, 또는 굽다리의 길이가 얼마나 짧고 길이가 긴가에 따라 시대적인 차이와 지역적인 특색이 있다. 표면 무늬는 민무늬(매끄러운 표면)가 주류지만, 예리한 음각 기법(陰刻技法=바늘이나 빗 등의 공구로 청차의 흙을 긁어서 문양을 나타내는 장식 기법)으로 새긴 삼각형, 밀집 평행선(빽빽하게 배열된 평행선), 그리고 컴퍼스를 써서 그린 듯한 원형 무늬 같은 문양대(紋樣帶=띠 모양으로 이루어진 무늬)를 나눔으로써 표면 장식의 효과를 냈습니다. 이밖에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와는 달리 항아리의 어깨나 뚜껑 위에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모양)를 붙여 주술적(呪術的=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려 재앙을 물러가게 하거나 앞으로 다가올 일을 점치는 것)인 의미를 나타낸 그릇도 있습니다. 이들 토우(土偶)에는 당시 신라(新羅) 사람들의 심성(心性=타고난 마음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라(新羅), 가야(伽倻) 토기(土器)의 변천사(變遷史=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바뀌어 온 과정을 기록한 것)는 무덤의 축조 연대에 기초하고 굽다리접시와 긴목항아리 변화에 따라 초기(250~350), 전기(350~450), 중기(450~550), 후기(550~660) 년으로 나누어 변화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 규두모자대도(圭頭母子大刀).

다른 이름으로 규두대도(圭頭大刀), 또는 오각 고리자루큰칼(칼 손잡이 끝에 오각형의 고리가 달린 칼)이라고도 합니다. 제작 연대는 삼국시대이며 재질은 철과 은으로 되어 있습니다. 칼의 길이는 60.4입니다. 자도(子刀=큰 칼에 부착된 작은 칼로, 마치 어미와 자식처럼 함께 존재하는 형태를 띠기 때문에 모자대도(母子大刀)라고 불린다)와 첨자(籤子=칼집에 부착된 금속 장식품으로, 칼이 칼집에서 쉽게 빠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음식물의 독성을 판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다)가 함께 출토(出土) 되어 모자대도(母子大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금동관(金銅冠).

제작 연대는 삼국시대이며 재질은 금동(金銅=금으로 도금하거나 금박을 입힌 구리)이고 길이는 35.6입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에서 출토(出土)된 금동관(金銅冠)으로 일부가 결실(缺失=일부가 빠져 없어짐)되고 여러 편(=조각)으로 남아 있습니다. 관테(관의 둥근 밑동 부분)3개의 나뭇가지 모양 세움 장식(신라 금관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장식 요소로, 나뭇가지 모양과 사슴뿔 모양)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의성양식토기(義城樣式土器).

의성지역(義城地域)에서 출토(出土)되는 토기(土器)는 다른 지역의 토기(土器)와 구분될 정도로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고배(高杯), 장경호(長頸壺), 단경호(短頸壺), () 등입니다.

고배(高杯=고대 식기의 하나로 높이 굽이 달린 접시).

이단 투창 고배(二段透窓高杯=5세기 이후 신라 지역에서 발달한 전형적인 토기입니다. 이 토기는 뚜껑이 있는 형태인 유개식(有蓋式)이며, 몸통이 반구형으로 되어 있다. 특히 대각부(大脚部=받침 부분)가 상하 두 단으로 구획되며, 각 단에 직사각형 투창(透窓=창 모양의 구멍)이 엇갈리게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의 뚜껑 받이는 6세기 때까지 배신(杯身=몸통)이 바깥으로 기울어진 형태가 지속되었다.

일단 투창 고배(一段透窓高杯=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사용된 토기로 고대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의 한 종류이다. 이 토기는 굽다리접시(고대 식기의 하나로 높은 굽이 달린 접시) 형태를 가지며, 대각(大脚=받침대) 부분에 한 단의 투창(透窓)이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발견되는 이단 투창 고배(二段透窓高杯)와 비교되는 형태로, 이단투창고배(二段透窓高杯)는 두 개의 단에 걸쳐 투창이 배치됐지만, 일단 투창 고배((一段透窓高杯)는 하나의 단에만 투창이 있는 구조), 다른 지역에 비해 몸통이 깊고 굽다리(그릇에 달린 높은 굽)의 아랫부분에 뚜렷한 그릇받침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장경호(長頸壺=목이 그릇 높이의 5분의 1 이상이 되는 둥근 항아리). 목이 몸통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고, 단경호(短頸壺)의 몸통에는 띠 모양의 돌출된 구조가 여러 줄 만들어져 있습니다.

단경호(短頸壺=목이 짧은 항아리). 목이 몸통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고 몸통에는 띠 모양의 돌출된 구조가 여러 줄 만들어져 있습니다.

(). 뚜껑을 말하며, 몸체와 드림(뚜껑과 연결되는 부분 또는 뚜껑이 덮이는 경계 부분)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 귀걸이.

다른 이름으로 세환이식(細鐶耳飾)이라고도 합니다. 제작 연대는 삼국시대이며 재질은 금() 또는 은()입니다. 길이는 2.9입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에서 출토(出土)된 가는 고리 귀걸이로, 구리로 만든 봉()에 금박(金箔=황금 또는 황금빛 물건을 두드리고 아주 얇게 늘려 종이처럼 만든 것)을 씌운 것을 구부려서 만들었습니다. 모양은 타원형이며 금박(金箔) 일부가 떨어져 있습니다.

. 목걸이.

다른 이름으로 경식(頸飾)이라고도 합니다. 제작 연대는 삼국시대이며 재질은 유리이고 크기는 지름이 0.2~0.4정도 됩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에서 출토(出土)된 목걸이며, 불투명한 푸른색 유리제 둥근 옥 3, 불투명한 붉은 갈색 광물제(鑛物製) 둥근 옥 270점 등으로 총 273점이 구성되어 있다. 구슬 구멍 지름은 0.1~0.2입니다.

. 과대 금구(銙帶金具=금속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

다른 이름으로 허리띠 장식이라고도 합니다. 제작 연대는 삼국시대이며 재질은 금동(金銅=금으로 도금하거나 금박을 입힌 구리)이며, 길이는 3.5정도 됩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에서 출토(出土)된 허리띠 장식으로 현재 띠고리와 띠꾸미개만 남아 있으며, 모두 금동제(金銅製=금으로 도금한 구리나 금박을 입힌 구리로 만듦. 또는 그런 물건)입니다. 띠고리는 자 모양으로 구부려 고리를 만들었다. 띠꾸미개는 모양이 직사각형에 가까우며, 침선문(針線紋=가느다란 봉이나 끝이 뾰족한 도구를 사용하여 표면에 새긴 무늬)이 새겨져 있다.

. 토기류(土器類).

방추차(紡錘車=물레에 가락을 걸기 위해 괴머리의 두 기둥에 고리처럼 만들어 박은 물건) 및 석구(石臼=돌절구) 10점을 제외하고 모두 토기(土器)입니다. 토기(土器)는 주로 의성양식토기(義城樣式土器)가 주류를 이루며 옹(=일반적으로 항아리 주둥이 지름보다, 바닥에서부터 높은 부분까지의 길이가 높은 항아리 형태의 토기<土器>), 발형기대(鉢形器臺=() 모양을 한 밑이 둥근 항아리 따위의 그릇을 올려놓는 데 쓰던 받침대. 삼국시대 특히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많이 나오며 굽구멍이 뚫려 있으며, 주로 제사용 또는 부장품으로 사용되었다), 파수부배(把手附盃=손잡이가 달린 잔 형태의 토기입니다.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 발견되며, 음료를 담아 제사나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를 제외하고 여러 종류의 토기가 짝을 이루어 함께 출토(出土)되었습니다.

유구별(遺構別=과거의 유적이나 유물이 남아 있는 구조물) 현황(現況=현재 상황)은 각 봉토(封土=흙을 높게 쌓아 올림 또는 그 흙)의 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무덤 안에서 시신 혹은 주요 인물이 실제로 묻혀 있는 중심 공간) 부곽(副槨=부장품이나 보조 시신 등이 들어가는 공간) A-1, B-1호에서 200여 점으로 가장 많은 토기(土器)가 출토(出土)되었습니다. 특히 A-1, B-1호에서는 흙을 빚어서 만든 다양한 토기(土器=원시 시대에 쓰던 흙으로 만든 그릇. 진흙으로 만들어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그릇)64, 도기(陶器=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리거나 약간 구운 다음, 오짓물(잿물=즉 유약)을 입혀 다시 구운 그릇. 검붉은 윤이 나고 단단하다)96점으로 개(=뚜껑)가 많이 부장(副葬=묘나 무덤에 함께 묻는 물건) 되었다.

여기서 귀()의 숫자에 따라 명칭이 부여되는 이부호(耳附壺=항아리의 어깨 부분에 젖꼭지 또는 말 머리 모양의 꼭지나 둥근 고리가 2~4개 달린 토기)의 부장양상(副葬樣相=항아리의 장식 요소인 귀들이 어떤 방식으로 부착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숫자에 따른 특징적인 차이)에서 차이가 나타나는데, 유구(遺構) A-1호는 귀()2개 붙은 양이부호(兩耳附壺=양쪽의 두 어깨에 둥근 고리 모양의 귀가 달린 항아리)만 부장(副葬=묘나 무덤에 함께 묻는 물건)된 데 비해 유구(遺構) B-1호에는 호(=항아리)에 붙은 귀()의 숫자가 많아지고 있다. 특히 개(=뚜껑)와 짝을 이루고 있는 삼이부호(三耳附壺=귀가 3개 붙은 항아리)가 가장 많이 부장((副葬) 된 점은 그때 당시의 유행을 엿볼 수 있습니다.

. 금속류(金屬類).

금속류(金屬類)는 총 150점으로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에서 130점이 출토(出土)되었고, 2호 고분(古墳) 주변 유구(遺構)에서 20점이 출토(出土)되었습니다. 마구류(馬具類=말을 타거나 부리는데 쓰는 기구)59점으로 가장 많이 출토(出土)되었고, 무기류(武器類=전쟁에 쓰이는 병기류) 32, 관곽부속구(棺槨 付屬具=시체를 넣는 데 쓰는 널과 덧널 그리고 여기에 딸린 도구나 기구) 31, 장신구류(裝身具類=몸치장하는데 쓰는 여러 가지 물건) 7점이 출토(出土)되었으며, 농공구류(農工具類=농업과 공업에 쓰이는 도구)5점으로 가장 낮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무기류(武器類)는 대도(大刀=큰 칼), 소도(小刀=작은 칼), 도자(刀子=몸에 지니거나 달고 다니던 짧고 작은 칼), 철모(鐵帽=전투 주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쇠나 섬유로 만든 모자), 철촉(鐵鏃=쇠로 만든 화살촉)으로 이 중 도자(刀子)23점으로 가장 많이 출토(出土)되었다. 농공구류(農工具類)는 철부(鐵斧=철로 만든 도끼로, 나무를 베거나 땅을 파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철기시대 이후로 농업과 공업에서 널리 쓰였으며, 무기로도 활용되었다) 2, 철겸(鐵鎌=철로 만든 낫으로, 곡식을 수확하거나 풀을 베는 데 사용되었다) 2, 살포(撒布=씨앗이나 비료 등을 넓게 뿌리는 도구) 1점으로 기종(機種=기계의 종류)이 다양하지 않았다. 장신구류(裝身具類)는 머리부터 발까지 착장 유물(着裝遺物=사람이 착용했던 유물, 즉 몸에 장착된 채로 발견된 유물)로 확인되었으며, 전체 한 세트(특정한 장신구류가 짝을 이루어 완전한 한 벌을 이루는 개념)를 구성하면서 출토(出土) 되지는 않았다.

. 의성지역(義城地域) 순장(殉葬=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그의 아내나 신화 또는 종들을 함께 매장하던 고대 장례 풍속) 사례(事例=이전에 실제 일어난 예).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과 함께 매장(埋葬)하는 순장(殉葬)은 묘곽(墓槨=무덤 내부에서 매장 공간을 구획한 구조를 의미한다. 즉 고분 내부에서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이 구조적으로 나누어진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 내에 1구 이상의 인골(人骨=사람의 뼈)이 확인되는 경우를 말한다. 의성지역(義城地域) 순장(殉葬)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전반까지 대형고분(大形古墳)의 묘곽(墓槨)인 변형 적석목곽묘(變形 積石木槨墓=고대 무덤 구조의 한 형태로, 목곽묘(나무로 만든 매장 공간) 주변을 돌로 보강하여 구조적 안정성을 높인 묘제. 일반적인 적석묘곽묘와 달리, 변형 적석목곽묘는 돌을 쌓는 방식이나 내부 구조에서 변형된 특징을 가지며,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와 목곽묘(木槨墓=무덤 속에 관을 넣어 두는 묘실을 나무로 짜서 만든 무덤)에서 확인되었다.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탑리고분(塔里古墳) 무덤 내부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 곽(=무덤 내부에서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은 순장묘(殉葬墓)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대리리(大里里) 3호 고분(古墳) 발굴조사(發掘調査)에서도 순장자(殉葬者)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 발굴조사(發掘調査)에서도 A-1호 주곽(主槨=중심이 되는 관이 놓인 공간)과 부곽((副槨=부장품이나 보조 시신 등이 들어가는 공간), B-1호 부곽(副槨)에서 순장(殉葬)이 확인되었다. 의성지역(義城地域) 순장사례(殉葬事例)는 배치 형태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먼저 A형은 머리 방향을 서로 반대로 하여 주피장자(主被葬者=순장 사례에서 중심이 되는 피장자, 즉 무덤의 주인공)와 위아래로 겹치거나 평행하게 매장(매장)된 유형, B형은 피장자(被葬者) ·우측에 동일한 방향으로 평행하게 매장(埋葬)된 유형, C형은 부곽(副槨)에 다량의 유물(遺物)과 함께 매장(埋葬)된 유형입니다.

A-1호 주곽(主槨)은 중앙에 안치된 인골(人骨) 2구와 함께 인골(人骨)의 머리 쪽에 토기(土器)와 방추차(紡錘車=물레에 가락을 걸기 위해 괴머리의 두 기둥에 고리처럼 만들어 박은 물건) 2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인골(人骨)은 두개골(頭蓋骨=머리뼈), 위팔뼈(上膊骨=어깨에서 팔꿈치까지의 팔의 부분을 이루는 뼈), 늑골(肋骨=갈비뼈), 어깨뼈, 다리뼈 등 부분적으로 잔존(殘存=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음)하고 있었습니다. 인골(人骨) 1구는 금동제 관모(金銅製冠帽=금과 구리를 합금하여 만든, 예전에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를 착장(着裝=금동제 관모를 머리에 쓰고 있는 상태)한 채 동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다른 인골(人骨) 1구는 장신구(裝身具=몸치장하는데 쓰던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를 전혀 걸치지 않았다. 두향(頭向=죽은 사람의 머리가 놓인 방향)은 앞에서 발굴(發掘)한 인골과 반대인 서쪽으로 두고 있다.

A-1호의 부곽(副槨=부장품이나 보조 시신 등이 들어가는 공간)은 바로 옆에 있는 대리리(大里里) 3호 고분(古墳)과 거의 같은 부장양상(副葬樣相=무덤 내부에서 유물이나 유해가 어떻게 배치 방식이나 형식)으로 남동쪽에서 인골(人骨) 1, 중앙에 금동제(金銅製=금으로 도금한 구리나 금박을 입힌 구리로 만듦. 또는 그런 물건) 마구류(馬具類=말을 타거나 부리는데 쓰는 기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 서쪽의 반()과 북동쪽에 토기(土器)를 부장(副葬=임금이나 귀족이 사망했을 때 죽은 이가 살아 있을 때 사용했던 귀금속, 그릇 등을 무덤에 시신과 함께 묻던 일. 꺼 묻기) 하여 놓았습니다.

얼굴의 오른쪽에 접해서 철모(鐵帽) 1, 왼쪽 다리 주변에서 도자(刀子=작은 칼) 1, 왼쪽 팔목 주변에서 도자자(刀子=작은 칼) 1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인골흔(人骨痕=사람의 뼈가 있던 자리에 남은 흔적)으로 보아 신전장(伸展葬=시체를 바로 펴서 매장하는 방법.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행하여 온 보편적인 매장법이다) 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골감정결과(人骨鑑定結果), 인골(人骨)은 부식(腐蝕=완전히 썩음)이 심하여 흔적만 남아 있는 상태여서 성별(性別=남과 여)이나, 연령(年齡=사람 나이)을 알 수 없으나, 남성일 경우 신장(身長=사람 키)151.9이고, 여성의 경우 147.95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B-1호 부곽(副槨=부장품이나 보조 시신 등이 들어가는 공간)에서는 인골(人骨) 4구와 함께 북쪽의 반()을 차지한 다량의 토기류(土器類)가 확인되었습니다. 인골(人骨) 4구는 모두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양 가장자리(바깥쪽)에 성인(成人=어른)을 한 명씩 안치(安置=놓아둠)하고 중앙에 유아(幼兒=어린아이)를 위아래로 한 명씩 놓아두었습니다. 인골감정결과(人骨鑑定結果), 인골(人骨)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아 성별(性別)이나 연령(年齡)은 알 수 없으나 한 가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자료 출처=경상북도 의성군 조문국 박물관.

의성군(義城郡) 조문국(召文國) 사적지(事蹟地) 1호 고분(古墳), 조문국(召文國) 경덕왕릉(景德王陵)입니다.

조문국 경덕왕릉(召文國 景德王陵).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 의성읍(義城邑)에서 남쪽으로 28번 국도(國道=나라에서 직접 관리하는 도로)를 따라 약 8.5지점 금성면(金城面) 대리동(大里洞) 384번지에 자리 잡은 옛 조문국 경덕왕릉(召文國 景德王陵)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古墳)으로서 봉분(封墳=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무덤을 만듦) 아래에 화강석(花崗石) 비석(碑石)과 상석(床石=무덤 앞에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돌로 만들어 놓은 상)이 있습니다. ()의 둘레가 74m이며 능() 앞에는 가로 42, 세로 22, 높이 1.6m의 비석(碑石=무덤에 묻힌 사람의 이름 및 행적을 나타내거나 어떤 사적이나 업적 또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돌에 글을 새겨서 세우는 것)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왕릉(王陵)이 발견되기에는 신기한 전설(傳說)이 있으니 조선(朝鮮)19대 임금인 숙종(肅宗) 때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문집(文集)에 실려 전해지고 있으며, 지역 주민들 사이에도 구전(口傳=말로 전함)으로 전승(傳承=문화, 풍속 제도 따위를 이어서 계승함)되고 있습니다. 문집(文集)에 실려 있는 전설(傳說)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먼 옛날에 한 농부(農夫)가 과전(瓜田=참외밭)을 마련하기 위하여 작은 언덕을 갈던 도중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들어가 보니 돌로 쌓은 석실(石室)이 나타났다. 석실(石室)의 둘레에는 금()칠을 하였고 가운데는 금소상(金塑像=금으로 만든 조각상)이 있는데, 그 머리에 쓴 금관(金冠)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농부(農夫)는 욕심이 나서 금관(金冠)을 벗기려 하였더니 그만 농부(農夫)의 손이 금관(金冠)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날 밤에 의성군수(義城郡守)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나는 경덕왕(景德王)이다. 아무 곳 아무 데 와서 살펴보고 이 무덤을 개수(改修=고쳐 수정함) 봉안(奉安=신주나 화상을 받들어 모심)토록 하여라라고 현몽(現夢=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속에 나타남)하였으므로 이튿날 곧 이곳을 발견하여 봉()을 쌓고 관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또 이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전해 온다.

현재의 능지(陵地=왕이나 왕후의 무덤이 있는 땅)는 약 500년 전에 오극겸(吳克謙)의 과전(瓜田=참외밭)이었는데, 참외를 지키던 어느 날 밤 꿈에 금관(金冠)을 쓰고 조복(朝服=예전에, 과원이 조정에 나아가 의식을 시행할 때 입는 예복(禮服)을 이르던 말)을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신라시대(新羅時代) 조문국(召文國)의 경덕왕(景德王)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 위이니 속히 철거하라라고 이르고는 오극겸(吳克謙)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놀란 참외밭 주인은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 등에 씌어 있어 현령(縣令)께 고()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封墳)을 만들고 매년 춘계 향사(春季享祀=봄철에 신령이나 조상의 넋을 기리며 음식을 바치는 제사 의식을 말함)를 올렸으며, 지금도 제례(祭禮) 행사는 계속되고 있다.”

옛 문헌에는 조선(朝鮮) 영조(英祖=조선 제21대 왕) 원년(元年=임금이 즉위한 해)1752년 의성(義城) 현감(縣監=고려 조선 때 작은 고을의 으뜸 벼슬)으로 부임한 이우신(李雨臣)이 경덕왕릉(景德王陵)을 증축(增築)하고 하마비(下馬碑=조선 시대, 종묘나 궐문 또는 문묘 따위의 앞에 세워 놓은 비석) 등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경덕왕릉(景德王陵) 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중단되었고, 그 이후에 경덕왕릉(景德王陵) 보존회(保存會)가 구성되어 다시 매년 춘계 향사(春季享祀=봄철에 신령이나 조상의 넋을 기리며 음식을 바치는 제사 의식을 말함)를 올렸으며, 지금도 제례(祭禮) 행사는 계속되고 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묘역은 조문국 경덕왕릉(召文國 景德王陵)’이라고 쓰인 비석(碑石)과 문인석(文人石=문관 형상으로 만들어진 돌. , 왕비의 무덤 앞에 세운다),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이나 절 안에 세우는, 돌로 만드는 등), 상석(床石)으로 단장되어 있습니다.

이외 2015.4월 의성(義城) 금성산(金城山) 고분군(古墳群) 일원(一圓=일정한 범위의 지역) 문화재 지표조사(地表調査=어떤 지역 내에 있는 유물의 유무, 분포, 성격 따위를 파악하기 위해 땅 위에 드러난 유적, 유물을 훼손하지 않고 조사 기록하는 일) 보고서에 의하면 조문국 경덕왕릉(召文國 景德王陵) 주위에는 374여 기의 고분(古墳)이 분포(分布)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96011월 국립박물관 김재원(金載元) 박사팀이 거대한 조문국(召文國) 고분(古墳) 1기를 발굴하여 금동관 등 다수 유물을 발견 조사하여 당시 상황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자료 출처=경상북도 의성군 조문국 박물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문국(召文國) 사적지(事蹟地) 작약꽃밭입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의성군(義城郡) 조문국(召文國) 사적지(事蹟地) 1호 고분(古墳), 조문국(召文國) 경덕왕릉(景德王陵)과 대리리(大里里) 2호 고분(古墳) 전시관(展示館) 그리고 3호 고분(古墳)과 주위에 있는 다른 고분(古墳) 풍경입니다.

의성군(義城郡) 조문국(召文國) 사적지(事蹟地) 입구에 세워져 있는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 면작기념비(棉作記念碑)입니다. 의성지역은 옛날부터 한약재로 작약과 함께 목화(木花)도 많이 재배했다고 합니다.

문익점 면작기념비(文益漸 綿作紀念碑).

문익점 면작기념비(文益漸 綿作紀念碑)가 있는 위치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대리리(大里里) 221-4번지(番地), 금성산(金城山) 고분군(古墳群)이 있는 조문국 사적지(召文國 史蹟地) 정문 근처를 지나가는 의성 탑리(義城塔里) 간 국도변(國道邊) 근처에 있습니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인 193512월에 경상북도지사(慶尙北道知事) 김서규(金瑞圭)가 문익점(文益漸)의 목화(木花) 재배를 기념하여 비문(碑文)을 짓고 의성군(義城郡)에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문익점 면작기념비(文益漸 綿作紀念碑)를 세운 연유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명작(緜作=목화 농사)을 독려(督勵=감독하여 격려함)하는 시책에 맞추어 이 비()를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비석(碑石)의 총 높이는 342, 비신(碑身=비문을 새겨 놓은 비석의 몸체)199, (너비)48.0, 두께 48입니다. 비석(碑石)에 새겨진 서체(書體=글씨체)는 해서(楷書=한자 서체의 하나. 예서에서 변한 것으로, 똑똑히 한자를 정자(正字)로 쓴 글자)입니다.

비석(碑石)은 규수방부형(圭首方趺形=머릿돌(비석의 윗부분)이 좌우 모서리의 각을 죽인 형태이고, 받침돌(비석의 아랫부분)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구조) 형태인 삼층(三層) 기단(基壇) 위에 촛대와 같은 비석(碑石)을 세워 놓았습니다. 비석(碑石)의 재질(材質=재료가 가지는 성질)은 사암(沙巖=퇴적암의 일종으로 모래알이 모여 뭉쳐진 것이 굳어져서 이루어진 암석)입니다. 비석(碑石)의 앞면에 종서(縱書=세로쓰기)로 충선공 부민 후 강성군 삼우당 문익점 선생(忠宣公富民侯江城君三憂堂文益漸先生)이라 쓰여 있고, 기단(基壇=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가 되는 단)에는 횡서(橫書=가로글씨)로 면작기념(棉作記念)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1329~1398)은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공민왕(恭愍王) 12년인 1363년에 서장관(書狀官=조선 시대, 중국에 보내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던 임시 벼슬)이 되어 중국(中國)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교지국(交趾國=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3년 동안 유배(流配=죄인을 귀양보내는 일) 생활을 하게 됩니다. 교지국(交趾國)에서 3년 동안 유배(流配) 생활을 끝내고 고려로 귀국할 때, 중국(中國) 금주성(錦州城)에서 종자(從者=남에게 딸려 따라다니는 사람) 김룡(金龍)을 시켜 목화(木花) 몇 송이를 딴 후 그 종자(種子)를 붓 뚜껑 속에 넣어서 돌아왔습니다. 몰래 가지고 온 목화(木花) 종자(種子)를 그의 장인(丈人=아내의 아버지)인 정천익(鄭天益)이 살고 있는 경상남도(慶尙南道) 산청(山淸) 장인 집의 화단(花壇)에 심어 시험 재배를 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면작(綿作=목화 농사)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재배 기술을 몰라 겨우 한 그루만을 살릴 수가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木花) 종자(種子)를 퍼지도록 하였습니다.

조선 태종(太宗=조선 3대 왕) 때 문익점(文益漸)의 손자(孫子) 문승로(文承魯)가 의성(義城)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 의성군(義城郡)의 지세(地勢=땅의 모양)가 중국(中國)의 금주성(錦州城)과 흡사(恰似=비슷한 모양)하여 현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제오리(提梧里)에서 목화(木花)씨를 재파종(再播種=다시 종자를 파종하는 것)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문익점(文益漸)은 중국(中國) ()나라에서 돌아와서도 목화(木花)씨를 번식(繁殖)하기 위함에 정성을 쏟았고, 자손(子孫)이나 친인척(親姻戚=혈연 및 혼인을 통하여 이루어진 친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의 힘까지 빌려서 목화(木花) 재배에 성공하자 노력하였습니다.

무명베(솜에서 뽑아낸 실로 짠 베)가 없던 시절 우리의 의복(衣服)은 너무나도 처참했고, 추위 때는 더욱더 심했습니다. 목화(木花) 재배에 성공하면서 빠른 속도로 보급된 무명베 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매서운 겨울 추위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모두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선생(先生)의 공적(功績)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익점(文益漸)의 자손(子孫)이 의성 땅에 목화(木花) 재배를 시작한 경위와 목화(木花)를 처음 중국(中國) ()나라에서 수입(輸入)해 온 조상(祖上)의 공적(功績)을 기리고자, 1909년 조선 순종(純宗=대한제국 2대 임금) 3년인 1909년에

목화(木花)씨를 처음 심은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제오리(提梧里) 1015-3번지(番地), 조선(朝鮮) 후기(後期) 학자(學者) 이자 항일의병장(抗日義兵將)으로 활동했던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가 비문(碑文)을 짓고, 김희국(金熙國)이 글씨를 쓴 문익점 목면 유전비(文益漸 木綿 遺傳碑)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193512월에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대리리(大里里) 221-4번지(番地), 금성산(金城山) 고분군(古墳群)이 있는 조문국 사적지(召文國 史蹟地) 정문 근처를 지나가는 의성 탑리(義城塔里) 간 국도변(國道邊) 근처에 문익점 면작기념비(文益漸 綿作紀念碑)를 새로 세웠다고 합니다. 자료 출처=한국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193512월에 세운 문익점 면작기념비(文益漸 綿作紀念碑) 비문(碑文)의 내용.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위인(僞人=거짓된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충()과 효()를 두루 갖춘 외에, 별도로 큰 공업(功業=공적이 뚜렷한 큰 사업)이 있어 능히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고 우리 백성(百姓)들에게 혜택이 되게 한 사람으로 문익점 선생(文益漸先生)과같이 성대한 자는 드물다. 선생(先生)의 휘(=죽은 어른의 생전 이름)는 익점(益漸)이오, (=성인이 된 후 받는 이름으로, 본래 이름 휘()와 함께 사용됩니다. 과거 중국과 한국에서 널리 쓰였으며, 주로 학문이나 사회생활에서 본래 이름 대신 사용합니다)는 일신(日新)이오, (=개인의 뜻을 담아 사용하는 별칭으로, 학문적 또는 예술적 활동에 자주 쓰였습니다. 자신을 상징하는 의미가 담긴 경우가 많으며, 예술가, 학자들이 자주 사용했습니다)는 삼우당(三憂堂)이다. 고려조정에서는 벼슬이 좌사의 우문관제학(左司議右文館提學)에 이르렀고, 다음 조정에서는 충선공(忠宣公)의 시호(諡號=예전에, 임금이나 정승,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이름)가 내려졌다. 처음에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했다가 후에 부민후(富民侯)로 추봉(追封)되었다.

평소 언행(言行=입으로 말하는 것과 몸으로 행하는 것)에도 역사에 기록이 없지 않으나, 특별히 표시 내고 들어내서 이에 크게 쓰고자 한 것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계묘년(癸卯年) 때인 1363년 때의 일이었다. 이때 당시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께서 중국(中國)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셔서 충언(忠言=충고의 말을 함)하다가 중국(中國) ()나라 황제인 원제(元帝)의 눈 밖에 나게 되어 남황(南荒=베트남 북부 지역)으로 유배(流配)를 가게 되었다. 3년 만에 비소로 유배지(流配地)에서 풀려나 돌아올 때 백화(白花=흰 꽃)가 눈같이 하얀 것을 보고 그것이 목면(木棉=목화)임을 알았다. 이때 당시만 해도 중국(中國) ()나라에서는 목면(木棉) 종자(種子)를 몰래 외국으로 반출(搬出=몰래 보낸다.)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고 있었다. 이렇게 법()으로 금함을 무릅쓰고 목면(木棉) 종자(種子)를 붓 뚜껑 속에 감추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곧바로 집에다 목면(木棉) 종자(種子)를 심고 또 목면(木棉) 종자(種子)를 고을에 번식(繁殖)시켰다. 일찍이 관찰사(觀察使=조선 시대 각도의 으뜸 벼슬) 되어 도내를 순회(巡廻=여러 곳을 돌아다님)하며 의성(義城), 그 땅의 형세(形勢)와 토질(土質)이 대략(大略=대충 어림잡아) 유배지(流配地)였던 교지(交趾=역사적으로 베트남 북부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와 서로 비슷한 것을 보고는 지방의 수령(守令=고려 조선 시대 때,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에게 알맞은 땅에 목면(木棉) 종자(種子)를 파종(播種)할 것을, 단단히 타일러 지시하였는데 그 지방의 수령(守令)은 곧 그의 손자(孫子) 문승로(文承魯)였고, 그 땅은 지금의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이었다. 또한 목면(木棉)에서 종자(種子)와 실을 뽑는 물레, 사추(絲錐=실을 뽑는 도구) 등은 대게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의 가정(家庭)에서 만든 것으로 목면(木棉)을 향한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의 마음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다.

당시에 우리나라의 본판(本板=본바탕)이 되는 것은 다만 마갈(麻葛=삼베와 칡으로 만든 옷감)과 모피(毛皮=털가죽)만 있는 줄 알았고, 다른 물건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다행히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의 공()으로 힘입어 600년 사이에 모든 백성이 얼지도 않고 굶주리지도 않았으니 이로써 논한다면 후직(后稷=중국 고대 신화 속 인물로, 농업의 신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심는 법을 가르친 것으로 전해지며, 주나라 조상으로도 알려져 있다)이 곡식(穀食)을 심고 서릉(西陵=누에를 처음 기른 인물 또는 비단 생산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이 누에를 처음 친 것과 땅을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이니, 모두 그러한 것이다. 어찌 홀로 예전만 오르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지금에 목면(木棉)은 비단 백성(百姓)들이 생활하는 요소가 될 뿐 아니라 장차 국가를 구제할 중추(中樞=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가 될 것이라 여겼다.

따라서 위로는 정부(政府)로부터 아래로는 마을에 이르기까지 장려함을 소리 내어 증식(增殖=더하여 늘림)할 바를 생각하였다. 나라의 모든 사람이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을 더욱 사모(思慕)하는 것이 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것처럼 전멸되지 않게 되리라 생각한다. 하물며 이 땅은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이 남긴 덕택(德澤=덕분)이 발원한 곳이다. 이에 중론(衆論=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어 마침내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의 선전(選田=특정한 땅을 가려서 정한 밭) 한 구역은 이에 목면(木棉)의 모범이 되는 밭이니 또 그 옆에 특별히 비석(碑石)을 세워 간략히 앞뒤의 실적(實蹟=확실한 흔적이나 자취)을 기록하였다. 그 일을 주장한 자는 군수(郡守) 권중환(權重煥)이요, 그 일을 도운 자는 관민(官民=공무원과 민간인)으로 여러 명이 있다. 또 그 소식을 듣고 메아리치듯이 호응하는 자도 오히려 두려움은 있었으나 혹 앞다투어 서로 희사(喜捨=기꺼이 재물을 내놓음)하여 공사가 이미 준공되었다. ! 돌아보건대 어찌 족히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의 경중(輕重=가벼움과 무거움)이 후세의 사람들이 보고 느껴서 떨치일어(興起)남에는 어찌 도움이 없다 하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매양 무명옷을 입을 때마다 목면(木棉)의 종래 공을 생각하며 일찍이 모름지기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을 잊지 않았으니, 지금 마침 올바른 길에 임하여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을 위하여 이 비()를 기록하게 된 것을 또 다행이라 여기고 영화롭게 여기지 아니한가? 드디어 중한 청을 감히 굳게 사양할 수 없었다. 자료 출처=국가유산 지식 이음.

1909년에 세운 문익점목면유전표비(文益漸木綿遺田表碑).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제오리(提梧里) 1015-3번지(番地)에 있는, 문익점목면유전표비(文益漸木綿遺田表碑)는 의성군(義城郡)에서 목화(木花) 재배를 처음 시작했던 유전(遺田=남겨진 밭 또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농지)에 문익점(文益漸) 후손들이 세운 비()로 대한제국 융희(隆熙=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 연호로 1909) 3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는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제오리(提梧里) 1015-3번지(番地) 금성산(金城山) 고분군(古墳群) 근처의 도로변(道路邊)에 있습니다. 비석(碑石)의 높이는 155.0, 너비는 48.0, 두께는 21.3입니다. 비각(碑閣=안에 비를 세워 놓은 집) 안에 세운 비()는 받침 없이 옥개형(屋蓋形=지붕처럼 덮인 구조나 형상을 가진 것) 지붕을 얹은 모양으로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앞쪽 아랫부분과 측면(側面=앞쪽이 아닌 옆면)의 비문(碑文=비에 새긴 글)이 마모(磨耗=마찰 부분이 닳아서 없어짐), 훼손(毁損=손상되었다)어 환경 개선이 필요합니다.

비문(碑文)의 서체(書體=글씨체)는 앞면과 후면 모두 해서(楷書=한자<漢字>의 서체 중 하나로, 글씨를 흘려 쓰지 않고 정자로 바르게 쓴 글)로 쓰여 있으며, 비문(碑文)은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학자(學者) 이자 항일의병장(抗日義兵將)으로 활동했던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충선공(忠宣公) 삼우당(三憂堂) 문선생(文先生) 목면유전표(木綿遺田表)”라는 비문(碑文)을 지었고, 비문(碑文)의 글은 김희국(金熙國)이 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도화(金道和)충선공(忠宣公) 삼우당(三憂堂) 문익점 선생(文益漸先生)이 처음 목면(木緜=목화<木花>)을 전파한 유전(遺田)에 대하여 설명한 후, 문익점(文益漸)의 공적(功績=노력과 수고를 들어 이루어 낸 일의 결과)을 칭송(稱頌=공덕을 일컬어 기림)하고, 목화(木花) 전래(傳來)에 대한 감회와 글을 짓게 된 경위 등을 밝혔습니다. 문익점(文益漸)의 후손(後孫) 중 목화(木花)밭 주위에 살고 있는 영환(永煥), 하영(河永), 영복(永穆), 복영(福永)이 목화(木花)밭을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고을의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비석(碑石)을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료 출처=국가유산 지식 이음.

목화(木花)=목화는 아욱과의 한해살이풀로, 원줄기는 높이가 60정도이고 잔털이 있고 줄기가 곧게 자라면서 가지가 갈라집니다. 잎은 어긋나고 가을에 흰색 또는 누런색의 오판화(五瓣花=꽃잎이 5장으로 된 꽃)가 잎겨드랑이에 핍니다. 열매는 튀는 열매를 맺으며 씨는 검은색이고 겉껍질 세포가 흰색의 털 모양 섬유로 변합니다. 솜털을 모아서 솜을 만들거나 실을 뽑아서 옷감을 만들고, 씨는 기름을 짜서 이용합니다. 다른 말로 목면(木緜, 木棉) 또는 면화(緜花)라고도 합니다.

충선공 삼우당 문선생 목면유전표(忠宣公 三憂堂 文先生 木綿遺田表) 비문(碑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올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충선공((忠宣公) 삼우당(三憂堂) 문선생(文先生)께서 처음 목화(木花)를 전파(傳播=널리 전하여 퍼뜨림)한 유전(遺田)이다. 오호라! ()이 돌아가시고 지나온 햇수가 500여 년이고 밭의 주인이 바뀐 것 또한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지만, 한 이랑의 토양은 기나긴 세월 속에서도 아직껏 아무런 탈 없이 보존(保存)되었다. 그런 까닭에 옛 노인(老人)이 서로 전하여 쇠하지 않았고 길을 가는 사람들도 가리켜 확인하며 탄식(歎息=한숨을 쉬며 한탄함)하니, 그 까닭은 어째서인가? 대개 공()은 남다른 자질(資質=타고나 성품이나 소질)로 바다 밖 구석진 나라에서 태어나 거의 끊어질 뻔한 정학(正學=바르고 정당한 학문)을 창도(唱導=어떤 일을 앞장서서 주장하고 부르짖어 사람들을 끌어나감)하고, 미혹(迷惑=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되고 빠진 데서 한세상을 구제(救濟)하여 성대하게 크게 변화한 조짐이 있었으니, 그 도()를 지키고 학문(學問)을 일으킨 공로(功勞)가 진실(眞實)로 크다 할 것이다.

또 일찍이 사명(使命=사신이나 사절이 받은 명령)을 받들고 원()나라로 가서는 강직하고 굽히지 않아 남쪽 변방(邊方=나라의 중심지에서 벗어나 남쪽 끝자락이나 국경 근처)으로 멀리 유배(流配=죄인을 귀양 보내던 일)되기에 이르렀으나, 그 보국충정(報國忠貞=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진심으로 헌신하는 마음)의 절개(節槪=신념이나 신의 따위를 굽히거나 바꾸지 않는 강직한 태도)가 다시 천하(天下=하늘 아래에 온 세상)에 찬란(燦爛=훌륭하고 화려함)하였다. 유배(流配)에서 풀려나 돌아올 적에 길에서 목화(木花)씨를 구해 만 리 길로 가져와서 우리나라 백성(百姓=옛날에, 사대부가 아닌 일반 평민을 이르던 말)들의 추위로 인한 걱정을 면하게 하였고, 영원토록 길이 의지하게 하였으니 그 공적(功績)과 이익이 백성(百姓)에게 미친 것을 어찌 돌아가셨다고 하여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의 사손(嗣孫=대를 이을 손자) 승로(承露)가 마침 이 고을에 부임(赴任=임명이나 발령을 받아 근무할 곳으로 감) 또 토질(土質=흙의 성질)을 살펴 목화(木花)의 번식(繁殖)을 넓혀 선조(先祖)의 공렬(功烈=뛰어난 공적)을 더욱 드러내었으니, 잘 받들어 계승(繼承)한 공로(功勞) 또한 구실을 삼을 만할 것이다. 오호라! 후직(后稷=중국 순임금 때 농사를 맡아보던 사람)이 처음 온갖 곡식(穀食)을 파종(播種)하여 백성(百姓)들의 곤궁(困窮=가난하여 살임이 구차함)과 굶주림을 구제하니, 주시(周詩)에서는 후직(后稷)의 공로(功勞)를 칭송(稱頌)하여 이르길능히 저 하늘과 짝하였다라고 했다. 대저(大抵=대체로 보아) 의복(衣服)과 음식(飮食)은 한 근원(根源)이다. 지금 충선공(忠宣公=문익점의 호)이 처음 목면(木緜=목화)을 파종(播種)하여 만백성(萬百姓)의 추위를 덮어 주었으니, 그 공로(功勞)가 어찌 다르다고 하겠는가? 남명(南冥) 조식 선생(曺植先生)은 시()에서 이르길, “백성(百姓)에게 옷을 입히니 후직(后稷)의 공()과 같도다라고 하였으니, 군자(君子=학식이 높고 행실이 어진 사람)의 오랜 세대에 걸친 공정한 평론인지(評論認知=오랜 세대에 걸친 공정한 평가)라 또 믿을 수 있다.

()의 후손(後孫) 중 목면(木緜=목화밭) 밭 주위에 살고 있는 영환(永煥), 하영(河永), 영목(永穆), 복영(福永)이 그 밭을 지나가면서 문득 두렵고 근심스러운 마음이 생겨 비석(碑石)을 세워 그 밭을 알리고자 고을의 사림(士林=유학을 닦는 선비들의 무리) 여러분과 묻고 상의하며 협동하여 나를 찾아와 그 일을 기록할 것을 부탁했다. 나는 선조(先祖)를 높이고 보위(保衛)하려는 정성에 감동하여 대략 그 대강(大綱=기본적인 중요한 줄거리)을 서술(敍述)하고 명(=비석에 새기는 글이나 기록)을 짓는다.

천생증민(天生烝民=하늘이 뭇 백성을 내심에),

의식시자(衣食是資=옷과 음식에 의지하게 했네!),

무식갈포(無食曷飽=음식이 없으면 어찌 배부를 것이며),

무의갈비(無衣曷庇=옷이 없으면 어찌 덮을 것인가),

후직기식(后稷其食=후직이 음식 먹게 하고),

공이기의(公以其衣=공께서 옷을 입게 하여),

기포이난(旣飽而煖=이미 배부르고 따뜻하니),

주감망지(疇敢忘之=어찌 감히 잊으리오).

() 행의금부도사(行義禁府都事) 문소(聞韶) 김도화(金道和) 근지(謹識),

() 행정릉참봉(行貞陵參奉) 광산(光山) 김희국(金熙國) 근서(謹書).

자료 출처=국가유산 지식 이음.

의성군(義城郡) 조문국(召文國) 사적지(事蹟地) 입구에 세워져 있는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 면작기념비(棉作記念碑) 옆에 세롭게 세워 놓은, 문익점 면작기념비(文益漸 綿作紀念碑) 안내석(案內石).

문익점 면작기념비(文益漸 綿作紀念碑) 안내석(案內石).

193512월에 경상북도지사(慶尙北道知事) 김서규(金瑞圭)가 세웠다는 문익점 면작기념비(文益漸 綿作紀念碑) 정면 우측에는 1991년 경상북도 도지사(慶尙北道 道知事) 재임시(在任時) 주변을 정비하고 면화(棉花)를 파종(播種)하여 문익점선생(文益漸先生)의 큰 업적(業績)을 기념(記念)하기 위하여 비()를 세웠다는 문익점 면작기념비(文益漸 綿作紀念碑)가 새롭게 세워져 있습니다. 의성군(義城郡) 금성면(金城面) 대리리(大里里) 면작기념비(棉作記念碑)에 기록된 비문(碑文)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삼우당 문익점 선생 면작기념비(三憂堂 文益漸先生 棉作記念碑).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2년인 1363년 삼우당 문익점 선생(三憂堂 文益漸先生)이 중국(中國) ()나라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3년 후 귀국할 때 중국(中國) ()나라 금주성(錦州城)에서 면화종자(棉花種子)를 필관(筆管=붓대)에 넣어 귀국하여 그의 장인(丈人) 정천익(鄭天益), 경상남도(慶尙南道) 산청(山淸)에서 목화(木花)를 시험 재배한 것이 우리나라 면작(棉作)의 시초(始初=맨 처음)가 되었다. 그 후 조선(朝鮮) 3대 왕인 태종(太宗) 때 그의 손자(孫子) 문승로(文承魯)가 의성현감(義城縣監)으로 부임(赴任)하여 금성면(金城面) 제오리(提悟里)에 면화(棉花)를 파종(播種)하여 오늘에 전하게 되었으며, 1909년 지역 주민들이 면화(棉花)를 파종(播種)한 원전(元田=의성군에서 목화를 처음 재배하였던 밭)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다시 1935년에 금성면(金城面) 대리리(大里里) 현 장소에 기념비(記念碑)를 세워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91년 김우현(金又鉉) 경상북도 도지사(慶尙北道 道知事) 재임시(在任時), 주변을 정비하고 면화(棉花)를 파종(播種)하여 문익점 선생(文益漸先生)의 큰 업적(業績)을 기념(記念)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료 출처=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 관광안내(觀光案內).

호국보훈의 달인 6월 첫 번째 주 월요일이 밝았습니다. 들녘과 산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색(草綠色) 푸른 녹음(綠陰)이 우거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지면서 오후 늦게부터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초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6월에도 하고자 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