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시 계림숲 서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풍경입니다.
※경주(慶州) 내물왕릉(奈勿王陵).
이 능은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재위 356~402년)을 모신 고분(古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물왕(奈勿王)은 신라 첫 경주 김씨(金氏) 왕인 미추왕(味鄒王)의 조카입니다. 석씨(昔氏)인 제16 대왕 흘해왕(訖解王=재위 310~356년)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내물왕(奈勿王)이 그 뒤를 이어서 신라 제17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로부터 제52대 효공왕(孝恭王=897~912)까지 경주 김씨(金氏)가 신라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내물왕(奈勿王)은 재위 기간에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여러 차례 왜구(倭寇)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외교와 국방에 힘썼다고 합니다.
1258년 고려, 제25대 왕인 충렬왕(忠烈王) 11년에 불승(佛僧) 일연(一然)스님이 지은 5권 3책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내물왕릉(奈勿王陵)이 점성대(占星臺=첨성대)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물왕릉(奈勿王陵)은 월성(月城=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었던 옛날 신라시대 성)의 서북쪽 계림 숲속 평지에 있습니다. 무덤 아래쪽에 둘레로 추정되는 자연석 일부가 겉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고분(古墳)의 규모가 작고 둘레돌이 무열왕릉(武烈王陵=신라 제29 대왕)과 비슷한 점 때문에 7세기 후반에 축조된 무덤으로 보기도 합니다. ※출처-경북 경주시 계림 숲 현지 안내문을 참고로 하여 새롭게 편집.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동편에 있는 계림숲 풍경입니다.
※경북 경주시 계림(鷄林) 숲.
계림(鷄林)은 경주(慶州) 김씨(氏)의 시조(始祖)인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숲입니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었던 숲으로, 시림(始林)이라고 하던 것을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후에 계림(鷄林)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탈해왕(脫解王=신라의 4대 왕) 4년(60)에 왕이 금성(金城=옛날 신라의 수도, 현재 경주지역)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보니 금(金)으로 된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閼智)’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閼智)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신라시대의 제5대 국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알지(閼智)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味鄒王=신라 13대 왕)입니다. 이후 내물왕(奈勿王)부터 신라시대가 끝날 때까지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鷄林)은 신성한 곳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조선(朝鮮) 순조(純祖=조선, 제23대 왕) 3년(1803)에 세운 김알지(金閼智)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 있습니다. ※출처-경북 경주시 계림 숲 현지 안내문을 참고로 하여 새롭게 편집.
신라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시 계림숲 서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풍경입니다.
신라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시 계림숲 서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주위 풍경입니다.
신라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시 계림숲 서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풍경입니다.
신라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시 계림숲 서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풍경입니다.
신라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시 계림숲 서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풍경입니다.
신라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시 계림숲 서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풍경입니다.
신라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시 계림숲 서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풍경입니다.
신라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시 계림숲 서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풍경입니다.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북서쪽편에 있는 계림숲 주변 풍경입니다.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북서쪽편에 있는 계림숲 주변 풍경입니다.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북서쪽편에 있는 계림숲 주변 풍경입니다.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북서편에 있는 계림숲 주변 풍경입니다.
경주시에서 황남동 고분군 주변에서 열고 있는 “2024년 경주 황금 정원 나들이 풍경입니다.
경주시에서 황남동 고분군 주변에서 열고 있는 “2024년 경주 황금 정원 나들이 풍경입니다.
경주시에서 황남동 고분군 주변에서 열고 있는 “2024년 경주 황금 정원 나들이 풍경입니다.
경주시에서 황남동 고분군 주변에서 열고 있는 “2024년 경주 황금 정원 나들이 풍경입니다.
경주시에서 황남동 고분군 주변에서 열고 있는 “2024년 경주 황금 정원 나들이 풍경입니다.
경주시에서 황남동 고분군 주변에서 열고 있는 “2024년 경주 황금 정원 나들이 풍경입니다.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릉(奈勿王陵) 북서쪽편에 있는 계림숲 주변 풍경입니다.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大陵園) 에 자리 잡은 신라 제13대 미추왕릉(味鄒王陵) 풍경입니다.
※경주(慶州) 미추왕릉(味鄒王陵).
이 능(陵)은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을 모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 제13대 왕인 미추왕(味鄒王=재위 262~284년)은 경주(慶州) 김씨(金氏)의 시조(始祖=한 겨레의 처음이 되는 조상)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제12대 첨해왕(沾解王=첨해(沾解) 이사금(尼師今=?~261년, 재위 247~261년). 성(姓)은 석씨(昔氏)이다. 신라 제9 대왕인 벌휴왕(伐休王)의 손자이며 신라 제11 대왕 조분왕(助賁王)의 아우이다. 249년에 사량벌국(沙梁伐國)을 공략하여 신라에 병합하고, 255년에 달벌성(達伐城)을 축조하여 백제를 견제하였다)이 아들 없이 죽자, 경주(慶州) 김씨(金氏) 가운데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백제(百濟)의 공격을 막아 내었고, 백성들에게는 농업을 장려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음 왕인 신라 제14대 왕인 유례왕(儒禮王) 때, 청도의 이서국(伊西國=고대 경상북도(慶尙北道) 청도(淸道)지역에 있었던 초기 국가)이 금성(金城=고대 신라의 수도, 지금 경주)을 공격해 오자 대나무 잎을 귀에 꽃은 병사들이 홀연히 나타나 나라를 구하고, 왕릉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여 죽장릉(竹長陵) 혹은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미추왕(味鄒王) 재위 23년에 왕이 별세하여 대릉(大陵)에 장사 지냈으며, 왕릉(王陵)은 흥륜사(興輪寺=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한 신라 최초의 사찰)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이, 고려(高麗)제 17대 왕 인종(仁宗=재위 1122~1146년) 23년에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능은 경주 분지 가운데인 대릉원(大陵園) 내에 있습니다. 능(陵)의 남쪽에 숭혜전(崇惠殿) 전이 있어 해마다 제향(祭享=각종의 제사 의식을 말함)을 받들고 있습니다. 능(陵)의 외형은 둥근 봉분토(封墳土)이며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주변의 다른 고분(古墳)과 마찬가지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덧널의 위를 사람 머리 크기의 자갈로 덮어 쌓고 흙을 덮은 무덤. 고대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경북 경주시 대릉원 현지 안내문을 참고로 하여 새롭게 편집.
경주시 황남동에 자리 잡은 대릉원(大陵園) 주변 풍경입니다.
※경주(慶州) 대릉원(大陵園) 일원(一圓), 경주(慶州) 황남동(皇南洞) 고분군(古墳群).
사적(史跡=역사상 중대한 시설로, 문화재서 가치가 큰 역사적 장소를 정부나 국가 기관에서 지정한 곳입니다.) 제512호는 원래 사적(事跡) 38호인 경주노동리고분군(慶州路東里古墳群), 사적(事跡) 39호인 경주노서리고분군(慶州路西里古墳群), 사적(事跡) 40호인 경주황남리고분군(慶州皇南里 古墳群), 사적(事跡) 41호인 경주황오리고분군(慶州皇五里古墳群), 사적(事跡) 42호인 경주인왕리고분군(慶州仁旺里古墳群)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경주시 평야 한복판에 서로 인접해 있는 신라시대고분군(新羅時代古墳群)을 통합하고, 사적(事跡) 제512호로 제 지정했습니다.
현재 사적(事跡) 512호 지역에 있는 주요 고분군(古墳群) 분포는 황남동(皇南洞) 고분군(古墳群)에는 미추왕릉(味鄒王陵), 천마총(天馬塚), 황남대총(皇南大塚)이, 노동리(路東里) 고분군(古墳群)에는 봉황대(鳳凰臺),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이, 노서리(路西里) 고분군(古墳群)에는 금관총(金冠塚), 서봉총(瑞鳳冢), 호우총(壺衧塚)이 있으며, 이밖에 황오동(皇五洞) 고분군(古墳群), 인왕동(仁旺洞) 고분군(古墳群)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덤의 양식(樣式=겉으로 드러나 있는 일정한 모양이나 형식)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관분=積石木槨墳)으로 축조되어있어 도굴(盜掘=곡분이나 묘지 따위를 허가 없이 몰래 파냄)이 어려워 대부분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대릉원(大陵園) 일원(一圓)에 있는 여러 고분(古墳)에서는 발굴 조사 과정에서 금속 유물을 비롯하여 수많은 토기와 생활용품이 출토되어 고대 신라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입니다.
제512호 사적지(事跡地)에 있는 대릉원(大陵園)은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산재해 있는 신라 초기의 고분군(古墳郡=오래된 무덤들이 모여 있는 지역)들로, 경주시에 산재해 있는 고분군(古墳群) 중 가장 큰 규모가 큽니다. 경주시 황남동(皇南洞) 서남쪽 평야지에 조성된 대릉원(大陵園)에는, 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로 관리됐으며, 현재는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30기(基)의 크고 작은 고분(古墳)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지상(地上)에 남아 있는 봉분(封墳)의 수는 30여 기(基)이지만, 1973년 고분공원(古墳公園) 조성 당시에는 흔적도 없는 고분(古墳)들이 지하에서 수백 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대형(大型) 고분군(古墳群) 사이 지표(地表) 아래에는, 봉분(封墳)이 파괴된 고분(古墳) 또는 원래 봉분(封墳)이 없거나 봉분(封墳)이 작은 소형 고분(古墳)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고분(古墳)은 지름 80m, 높이 20m에 이르는 왕릉급(王陵級) 대형고분(大型古墳)에서부터 불과 수십 미터(m)의 소형분(小型墳)에 이르기까지 규모가 다양한데 여기에는 미추왕릉(味鄒王陵), 검총(劍塚 100호분), 황남대총(皇南大塚), 천마총(天馬塚) 등의 고분(古墳)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덧널의 위를 사람 머리 크기의 자갈로 덮어 쌓고 흙을 덤은 무덤.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무덤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습니다. 대릉원(大陵園) 안에는 많은 고분(古墳) 중에서도 5~6세기 무렵에 축조된 천마총(天馬塚)과 미추왕릉(味鄒王陵) 그리고 황남대총(皇南大塚)이 대표적인 고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3년에 발굴 조사된 천마총(天馬塚=제155호 고분)은 봉분의 지름이 47m, 높이가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발굴 당시 천마도(天馬圖)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天馬塚)이라 이름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현재 천마총(天馬塚)은 1973년에 발굴을 마치고, 원형 그대로 내부를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1973년부터 197년까지 발굴 조사된 황남대총(皇南大塚)은 봉분의 남북(南北)길이가 120m, 동서(東西), 둘레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있는 과대(銙帶=금속으로 만든 장식품을 달아 만든 띠)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릉원(大陵園)은 경주 시내 중심에 있는 약 12만 평의 대지(大地=대자연의 넓고 큰 땅. 좋은 묏자리)에 삼국시대 신라의 왕, 왕비, 귀족 등 30기의 고분(古墳)이 밀집된, 고대 신라시대 최대의 고분군(古墳群)입니다. 대릉원(大陵園)이란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 “미추왕(味鄒王) 재위 23년에 왕이 별세하니 대릉(大陵, 죽장릉<竹長陵>)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고분(古墳)이 산이 아닌 평지에 자리 잡은 고대 신라시대의 독특한 무덤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경북 경주시 대릉원 현지 안내문과 경주시 문화관광공사, 인터넷 검색 내용을 일부 인용하여 새롭게 편집.
대릉원(大陵園)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많이 촬영하는 유명한 장소입니다. 정면에 보이는 나무는 목련 나무입니다. 목련 나무 뒤편이 보이는 고분은 대릉원에서 규모가 가장 큰 황남대총입니다.
경주시 황남동에 자리 잡은 대릉원(大陵園)에서 고분의 규모가 가장 큰 황남대총입니다.
※황남대총(皇南大塚).
황남대총(皇南大塚) 명칭은 “경주시 황남동(皇南洞)에 있는 신라 최대의 고분(最大 古墳=큰 무덤)”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황남동(皇南洞) 고분군(古墳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봉분(封墳)이 표주박(瓢주박=조롱박이나 둥근 박을 반으로 쪼개 만든 작은 바가지)처럼 보이는 고분(古墳)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관리해 오던 관리번호 98호 고분(古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3년 고분공원(古墳公園) 조성 계획에 따라 경주 고적(古跡) 발굴(發掘) 조사단이, 1973년 7월부터~1975년 10월까지 문화재 관리국 조사단이 발굴 조사를 마쳤습니다. 현재는 봉분(封墳)의 외형이 완전하게 복원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황남대총(皇南大塚)은 남분(南墳=남쪽 무덤)의 높이는 23m, 북분(北墳=북쪽 무덤)의 높이는 22m로 남분(南墳)이 조금 더 높습니다. 또한 남쪽과 북쪽의 길이는 120m, 동쪽과 서쪽의 길이는 80m, 높이는 23m로 조성된 쌍분(雙墳)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고분(古墳)은 고분공원(古墳公園)뿐만 아니라, 신라의 모든 고분(古墳) 중에서 봉분(封墳)의 높이와 크기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남대총(皇南大塚)은 남쪽과 북쪽으로 지름 80m인 원형(圓形)의 홑무덤 두 개가 남북으로 서로 맞붙어 있는 쌍분(雙墳=합장하지 않고, 같은 묏자리에 나란히 쓴 부부의 두 무덤)이며, 남쪽 무덤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남쪽 무덤을 북쪽 무덤에 연결해서 봉분(封墳)을 만든 표형분(瓢形墳=두 개의 봉분이 표주박처럼 서로 나란히 붙어 있는 무덤) 무덤입니다. 무덤의 구조는 모두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관분=積石木槨墳)으로 남쪽 무덤에는 남자가 묻혔고, 북쪽 무덤에는 여자가 묻혔으며, 이들은 부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발굴 당시 남자 무덤인 남분(南墳)의 매장부(埋葬部)는 바깥 덧널 인 외곽(外槨)과 안쪽 덧널 내곽(內槨)의 이중 구조로, 안덧널에는 무덤 주인의 시신을 안치한 으뜸덧널인 주곽(主槨)과 부장품(副葬品)을 모아 둔, 딸린덧널인 부곽(副槨)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부장품(副葬品)인 유물은 주인의 시신을 안치해 놓은 으뜸덧덜에서 금동관(金銅冠=삼국시대에 상류 계층이 사용하던 관. 얇은 금동 판으로 머리둘레만큼 띠 모양으로 만들고, 산자형이나 불꽃 모양을 투각한 장식을 달았다), 금제 허리띠, 금동 장식, 환두대도(環頭大刀=손잡이 부분에 둥근 모양의 고리가 있는 칼), 금으로 장식된 칼 등이 피장자(被葬者=무덤에 매장되어 있는 사람)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습니다. 딸린덧널(副槨)에서는 은관, 은모, 금관관식, 금은 반지, 금귀걸이, 봉수형 유리병, 유리잔과 다양한 무기류, 마구류(馬具類)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으뜸덧널에서는 무덤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60세(歲) 전후로 판단되는 남자의 유골(遺骨) 일부와 순장(殉葬)된 20세 전후의 여성 유골(遺骨)이 확인되었습니다.
여자 무덤인 북분(北墳)의 매장부(埋葬部)는 남분(南墳)과 똑같이 바깥덧널인 외곽(外槨)과 안쪽 덧널인 내곽(內槨)으로 된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안쪽 덧널인 내곽(內槨)은 남분(南墳)과 달리 시신을 안치한 으뜸덧널인 주곽(主槨)만 있고, 부장품(副葬品)을 모아 둔 딸린덧널인 부곽(副槨)을 따로 만들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대신 부장품(副葬品)은 바깥덧널에 별도 공간을 마련해 모아 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부장품(副葬品)인 유물은 으뜸덧널에서는 금관(金冠), 은 허리띠, 금제관드리개, 금구슬, 유리구슬 목걸이, 금팔찌, 금제 허리띠, 금반지, 가락바퀴(물레에 가락을 걸기 위해 괴머리의 두 기둥에 고리처럼 만들어 박은 물건)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북분(北墳)에서 출토된 유물은 남분(南墳)에 비해서 장신구(裝身具=몸치장하는데 쓰는 여러 가지 물건)가 월등히 많지만, 무기와 마구(馬具)가 적고 피장자(被葬者=무덤에 매장되어 있는 사람)가 칼을 착용하지 않은 되신 가락바퀴가 출토되어, 북분(北墳)을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은 허리띠에 부인대(夫人帶)라고 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여자의 무덤임이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남편의 무덤에서는 금동관(金銅冠)이 나오고, 부인의 무덤에서는 금관(金冠)이 나온 것을 근거로, 부인이 남편보다 신분이 높은 혈통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금동관(金銅冠)이나 금관(金冠)은 실제 일상생활에서 항상 쓰는 것이 아니라, 무덤 속에 묻기 위해 만든 예도 있고, 부인이 남편보다 나중에 사망했기 때문에 부장물(副葬物=장사를 지낼 때, 주검과 함께 묻는 패물이나 그릇, 연장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차이가 있었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습니다.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5만 8,441점이며, 이중 북분(北墳)의 금관(金冠), 금제 허리띠, 남분(南墳)의 봉수형 유리병(유리잔 포함), 금목걸이 등 4점은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습니다.
황남대총(皇南大塚)은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주인공들은 화려한 황금(黃金) 장신구(裝身具)로 치장(治粧=매만져 곱게 꾸미거나 모양을 냄)하고 있어 마립간(麻立干=신라 때, 임금 칭호의 하나)의 왕릉(王陵)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을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재위 350년~402년), 제18대 실성왕(實聖王=재위 402년~417년), 제19대 눌지왕(訥祗王=재위 417년~458년) 중 한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출처-경주시 대릉원 현지 안내문, 경주시 문화관광공사, 인터넷 검색에서 일부 내용을 인용해서 새롭게 편집했습니다.
경주시 황남동에 자리 잡은 대릉원(大陵園)에서 무덤의 내부를 볼 수 있는 천마총입니다.
※경북 경주시 대릉원 천마총(天馬塚).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형태인 천마총(天馬塚)은 목관(木棺)을 안치하고, 그 위에 나무 덧널을 짠 후 주위와 윗부분을 돌로 쌓고, 물이 새어들지 못하게 진흙을 덮어 다지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어 마무리한 돌과 덧널을 사용해 만든 돌무지덧널무덤(덧널의 위를 사람 머리 크기의 자갈로 덮어 쌓고 흙을 덮은 무덤.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다른 말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라고도 한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덤 전제 둘레는 157m, 봉분(封墳=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무덤을 만듦)의 지름은 50m, 높이는 12.7m 정도 되는 무덤으로, 구조는 평지 위에 목관(木館=나무 널)과 껴묻거리(副葬品=부장품) 상자를 놓고, 봉토(封土=흙으로 쌓아 올림) 안쪽에는 냇가의 돌로 쌓아 올린 적석층(積石層=돌로 쌓아 올린 층)이 있고, 적석층(積石層) 안쪽에는 길이 6.5m, 너비 4.2m, 높이 2.1m의 나무로 된 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방 중앙에 목관(木棺)을 놓고 시신을 안치한 형태로 되어 있었고, 그 바깥에 나무로 짠 덧널(木槨=목곽) 을 설치하여 돌덩이를 쌓고 흙으로 덮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천마총(天馬塚)은 봉분이 비교적 큰 무덤이고, 축조연대는 5세기 후반에서~6세기 초에 축조된 어느 왕릉 혹은 그에 버금가는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천마총(天馬塚)은 1976년 4월 6일에 발굴을 시작하여 약 8개월 뒤인 1973년 12월 4일에 발굴조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도굴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발굴 당시 1921년 금관총(金冠塚), 1924년 금령총(金鈴塚), 1926년 서봉총(瑞鳳冢) 등 기존에 발굴된 3개의 금관(金冠)보다 훨씬 발전된 금관(金冠)을 비롯하여 금모자(국보 제189호), 새날개 모양 관식(冠飾=왕과 왕비가 쓴 관<冠>의 장식물), 금 허리띠, 금동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彼葬者=무덤에 매장되어 있는 사람)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습니다. 이 밖에 유물 11,526여 점도 같이 출토되었습니다.
1973년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부장품(副葬品=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 함께 묻는 물품을 통틀어 이르는 말)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 그림인 천마도(天馬圖)가 그려진 장니(障泥=말을 탄 사람에게 흙이 튀지 않게 하려고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려 놓은 기구로 ‘말다래’라고 한다)가 출토되었는데, 긴 혀를 내밀고 꼬리를 추켜세워 마치 하늘을 나는 듯 묘사된 천마(天馬)가, 죽은 사람을 하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게 해주는데 천마도(天馬圖)의 동물은, ‘말’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마에 뿔이 있는 상상 속의 동물인 ‘기린(麒麟)’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출토된 천마도(天馬圖)는 자작나무 껍질 위에 흰색으로 천마(天馬)를 그려 놓은 장니(障泥=말다래)를 말하며, 5~6세기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장니(障泥=말다래)는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말안장 양쪽에 대는 기구입니다. 이런 천마도(天馬圖)는 고대 신라인의 회화(繪畵=평면상에 색채와 선을 써서 여러 가지 형상과 느낀 바를 표현하는 조형 예술)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천마총(天馬塚)에서 발견된 천마도(天馬圖)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토된 귀중한 그림입니다. 현재 천마도(天馬圖)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대표적인 회화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국보 제20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특히 천마총(天馬塚) 금관(金冠)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국보 제188호) 중 가장 크고 화려합니다. 천마총(天馬塚) 금관(金冠)은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형태로 앞면에는 나뭇가지 모양인 4단의 ‘출(出)’자 모양의 장식이 솟아 있고,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두 줄 장식이 있습니다.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에는 생명력을 상징하듯 돋아나는 싹 모양과 태아(胎兒=모체의 태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 형태의 곡옥(曲玉=반달 모양으로 구부러진 모양의 구슬) 장식들이 달려 있습니다. 금관(金冠) 옆으로 금(金) 장신구(裝身具=몸치장하는데 쓰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새가 날개를 활짝 편 모양의 화려한 금장식은 신라 사람들이 쓰는 모자에 꽂는 것으로 추측되며, 금 허리띠에는 물고기와 곡옥(曲玉), 철기를 만든 모양마다 당시 신라에서 중요시되던 상징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추측하지만, 지금까지 정확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천마총(天馬塚)에서는 서조도 채화판(瑞鳥圖彩畵版=천마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채화판<彩畫版>. 앞면에는 상서로운 새가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이 그려져 있다) 와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말을 타고 있는 사람을 그린 그림)도 출토되었습니다.
또 그릇에 담긴 채 발견된 달걀이나 마구(馬具) 등 다양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알을 매우 신비하게 생각했습니다. 천마총(天馬塚)에서 발견된 달걀도 부활(復活)을 바라는 마음으로 부장품(副葬品)으로 함께 묻은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인 주몽(晝夢)과 신라시조(新羅始祖)인 박혁거세(朴赫居世), 금관가야(金官伽倻) 시조(始祖)인 수로(首露)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는 공통된 설화(說話)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천마총(天馬塚) 무덤 꼭대기의 봉토(封土) 속에서는 마구(馬具=말을 부리는 데 쓰이는 도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말을 순장(殉葬=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그의 아내나 신하 또는 종들을 함께 매장하던 고대 장례 풍속)시키던 풍습이 변하여 말을 탈 때 필요한 물건을 대신하여 묻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마구(馬具)를 부장품(副葬品)을 묻은 것은 천마도(天馬圖)와 마찬가지로, 무덤 주인공의 영혼이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천마총(天馬塚)에서 출토된 금관(金冠)과 유물로 보아 이곳에 묻힌 사람은 신라 21대 왕인 소지왕(炤智王 재위 479~499년) 또는 신라 22대 왕인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3년)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물증이나 기록이 없어 대표 출토품인 천마도(天馬圖)에다 이름을 붙여 ‘천마총(天馬塚)’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현재 천마도(天馬圖)는 국보 제27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습니다. 천마총(天馬塚)에서 발굴된 금관을 비롯한 유물은 국립 경주박물관에서 일반인들이 볼 수 있게 전시해 놓았습니다.
대릉원(大陵園)의 고분군(古墳群) 중 유일하게 일반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있는 고분(古墳) 천마총(天馬塚)은, 발굴 당시 봉분(封墳)은 마치 화산분화구(火山噴火口)처럼 움푹 들어가 있어서, 봉분(封墳)에 흙을 채워 봉긋하게 무덤 형태를 알 수 있게 복원한 후 내부를 볼 수 있게, 유리전시관 안의 썩은 목관(木棺)은 그대로 둔 채 덧널만을 복원해 목관(木棺) 내부를 볼 수 있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현재 천마총(天馬塚) 내부에는 출토된 주요 유물은 복제품을 만들어
모형전시관에, 발굴 당시의 유물이 놓여 있던 모습 그대로 실물처럼 볼 수 있게 공개해 놓았습니다. ※출처-경주시 대릉원 현지 안내문, 경주시 문화관광공사, 인터넷 검색에서 일부 내용을 인용해서 새롭게 편집했습니다.
미국이 원산지로 알려진 버들잎 해바라기입니다. 잎이 버들잎과 비슷하게 닮았습니다. 주로 가정집, 아파트 단지, 공원 등에서 조경용으로 많이 심고 있습니다.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구광역시 경북 농업기술원 풍요로운 가을 풍경. (49) | 2024.10.13 |
---|---|
즐거움과 행복이 넘치는 성탄절 연휴 잘 보내세요. (109) | 2023.12.23 |
2023.9.20. 대구광역시 북구 학정동 경북농업기술원 초가을 여행, 풍요로움이 넘치는 황금 들녘-하. (48) | 2023.09.24 |
2023.9.20. 대구광역시 북구 학정동 경북농업기술원 초가을 여행, 비둘기와 흰뺨검둥오리. (49) | 2023.09.23 |
2023.9.20. 대구광역시 북구 학정동 경북 농업기술원 초가을 여행, 풍요로움이 넘치는 황금 들녘-중. (39) | 2023.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