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식(寒食).
1. 한식(寒食)의 정의(定義).
한식(寒食)은 일 년 24절기(節氣) 가운데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로, 청명(淸明)과 같은 날이거나 그다음 날에 해당합니다. 양력(陽曆)으로는 대체로 4월 5일이나 6일 무렵이고, 음력(陰曆)으로는 2월이나 3월에 들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음력(陰曆) 2월 한식(寒食)과 3월 한식(寒食)을 구분하는 관념(觀念) 있습니다. 그래서 음력(陰曆) 2월에 한식(寒食)이 드는 해는 세월(歲月)이 좋고 따뜻하다고 여겼으며, 봄이 일찍 시작된다고 여겼습니다. 반면 음력(陰曆) 3월에 한식(寒食)이 들면 봄이 늦게 오는 것으로 여겼고, 지역에 따라서 무덤을 덮은 풀이나 흙을 새로 갈아입는 개사초(改莎草=무덤을 단장하는 행위)를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인식(認識)에서 비롯되어 “음력(陰曆) 2월 한식(寒食)에는 꽃이 피지 않고, 음력(陰曆) 3월 한식(寒食)에는 꽃이 핀다.”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식(寒食)은 설날,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우리나라 전통적(傳統的)인 4대 명절 가운데 하나이며, 세시풍속(歲時風俗)으로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계절적(季節的)으로는 청명(淸明) 절기(節氣) 무렵이라 한 해 농사(農事)가 시작되는 철입니다. 설날이나 추석(秋夕)처럼 음력(陰曆) 명절(名節)이 아니어서 명절(名節) 제사(祭祀)가 아닌 절기제사(節氣祭祀)를 지내며, 조상(祖上)의 무덤을 찾아 보수(補修)하고 성묘(省墓)하는 풍습(風習)이 이어져 왔습니다. 한식(寒食)은 원래 중국(中國)에서 전래(傳來)된 절기(節氣)였으나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토착화(土着化)되어 중요한 명절(名節)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한식(寒食)이 우리나라에서 토착화(土着化)되었다고 하지만, 언제부터 명절(名節)로 인식(認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옛 기록(記錄)에 의하면, 고려(高麗) 제11대 왕인 문종(文宗) 24년(1070년)에 한식(寒食)이 연등(燃燈) 날짜와 겹치므로 연등(燃燈)을 다른 날로 바꾸었다는 기록(記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늦어도 고려(高麗) 전기(前期)에는 이미 한식(寒食)이 중요한 명절(名節)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식(寒食)날에는 금화(禁火)와 성묘(省墓)의 풍습(風習), 그리고 계란(鷄卵)에 그림을 그려 겨루는 투란(鬪卵=계란 위에 누가 그림을 더 잘 그리는지를 겨루는 유희<遊戲>) 놀이가 있었으며, 소나기와 강풍(强風)이 잦은 날로 인식(認識)되었습니다. 고려 시대(高麗時代)에는 한식(寒食)의 시기(時期)가 달라졌는데, 고려(高麗) 후기(後期)에는 동지(冬至) 후 105일이었으나 전기(前期)에는 약 7일 정도 빠른 양력(陽曆) 3월 30일 무렵이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우리나라 북쪽 지방이 남쪽보다 한식(寒食)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傾向)이 있었습니다. 한식(寒食)은 일정 기간 불의 사용을 금하며 찬 음식을 먹는 고대(古代) 중국(中國)의 풍습(風習)에서 비롯되었으며, 옛날 중국(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 사람들은 한식(寒食)을 다른 이름으로 고초일(苦草日), 금연일(禁煙日), 숙식(熟食) 또는 냉절(冷節) 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한식(寒食)은 어느 해나 청명절(淸明節) 바로 다음 날이거나 같은 날에 들게 됩니다. 이때는 양력(陽曆) 4월 5~6일 무렵이고 날씨가 따뜻한 봄철이라 나무 심기에 알맞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한식(寒食) 무렵인 매년(每年) 양력(陽曆) 4월 5일을 식목일(植木日)로 정하여 나무를 심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만, 식목일(植木日)이 매년(每年) 양력(陽曆) 4월 5일로 지정된 것에는 역사적(歷史的), 기후적(氣候的) 배경(背景=어떤 일이 일어나게 된 바탕이나 이유)이 있습니다. 역사적(歷史的)으로는 조선(朝鮮) 제9대 왕인 성종(成宗)이 선농단(先農壇=고려, 조선 시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던 제단)에서 직접 밭을 일구었던 날(양력으로 환산 시 4월 5일경)이며, 신라(新羅)가 당(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완수(完遂)한 날을 기념(紀念)하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기후적(氣候的)으로도 청명(淸明)과 한식(寒食) 무렵은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적절한 기온(氣溫)과 습도(濕度)를 유지하기 좋은 환경(環境)이 됩니다. “한식(寒食)에 나무를 심으면 잘 자란다”라는 오랜 믿음 역시 식물일(植木日) 제정(制定)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한식(寒食)은 24절후(節候=절기) 속에 들어 있지는 않으나 습속(習俗=습관이 된 풍습)으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공동체(共同體)가 함께 전승(傳承) 해온 생활관습(生活慣習)으로 인정받아 2023년 국가무형유산(國家無形遺産)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경주시(慶州市) 선덕여왕(善德女王) 길 왕벚나무꽃 길입니다.









경주시 왕벚꽃 명소 선덕여왕(善德女王) 길.
♣. 경주시(慶州市) 선덕여왕(善德女王) 길.
경주시(慶州市) 선덕여왕(善德女王) 길은, 경주시(慶州市) 보문동(普門洞) 43-24 일원(一圓)에 있는 서쪽 명활산성(明活山城)에서 동쪽 진평왕릉(眞平王陵)까지 이어지는 약 4.0㎞ 거리의 농수로(農水路) 둑길입니다. 농업용(農業用) 농수로(農水路)와 나란히 이어지는 선덕여왕(善德女王) 길 주변에 조경수(造景樹)로 왕벚나무와 겹벚꽃을 심어 산책로(散策路)를 조성해 놓았습니다. 또한 바닥이 부드러운 황토(黃土) 흙길로 조성되어 있고, 경사가 거의 없는 산책로(散策路)는 맨발 걷기 체험과 역사(歷史) 유적(遺跡) 탐방(探訪)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힐링 명소(名所)로 유명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봄철에 아름답게 핀 벚꽃이 진 뒤 1~2주 늦게 겹벚꽃이 만개해 경주 벚꽃 시즌을 연장합니다. 포토 존은 왕벚꽃과 겹벚꽃 터널, 농수로(農水路)와 주변에 펼쳐지는 논밭을 배경으로 한 직선 구도, 코알라 오브제 인형 등 아름다운 추억을 남길 수 있는 다양한 촬영 명소가 있습니다. 매년 벚꽃이 아름답게 피는 4월이면 ‘선덕여왕(善德女王) 길 맨발 걷기 행사’와 역사(歷史) 유적(遺跡) 탐방(探訪), 먹거리촌까지 한 번에 경험할 수 있어 가족(家族)과 연인(戀人) 관광객(觀光客) 모두에게 추천할 만한 힐링 코스입니다. 신라 시대(新羅時代) 경주(慶州) 동쪽 방어 거점이었던 명활산성(明活山城)에는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비담(毗曇)의 반란(叛亂) 기록(記錄)이 남아 있습니다.
대중교통(大衆交通)인 시내버스를 이용할 때는 경주시(慶州市) 시외버스터미널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정류장에서 숲 머리마을 방향으로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합니다. 승용차(乘用車)를 이용할 때는 명활산성(明活山城) 입구에 있는 무료 주차장(駐車場)을 이용하거나 숲 머리 먹거리촌에 있는 무료 공용주차장(共用駐車場)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편의시설(便宜施設)은 화장실(化粧室), 벤치, 포토 존 조형물(造形物) 등 가족(家族) 단위 방문객(訪問客)도 편리하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먹거리는 인근 숲 머리 먹거리촌에서 숯불갈비, 순두부찌개, 막국수 등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습니다.





2. 한식(寒食)의 유래(由來).
‘한식(寒食)’은 문자(文字) 그대로 ‘찬 음식’이라는 뜻입니다. 한식(寒食)은 중국(中國) 전통(傳統)의 절기(節氣) 가운데 하나로, 중국(中國) 주(周)나라(고대<古代> 기원전<(紀元前 11~13세기, 1046~256년>)에서부터 불을 끄고 찬 음식(飮食)을 먹는 풍습(風習)에서 시작된 것이 한식(寒食)의 기원(起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중국(中國) 산서성(山西省) 지방에서 시작되어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말(末)인 5~6세기(420~589년)부터 전국적인 행사로 확대되었습니다. 시행(施行) 초기(初期)에는 날짜도 일정하지 않았지만, 후한시대(後漢時代=서기 25~220년)부터 동지(冬至) 후 105일 전후(前後) 3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24절기(節氣)의 하나로 한식(寒食)과 날짜가 겹치는 청명(淸明)은 동지(冬至) 후(後) 107일로 밀려났으며, 이후 청명(淸明)은 한식(寒食)의 일부로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식(寒食)은 농사(農事)의 시작과 겹치므로 풍년(豊年)을 기원(起源)하여 제기차기, 그네 타기, 갈고리 던지기 같은 여러 가지 놀이를 하였으며, 중국(中國) 당(唐)나라(서기 618~907년) 무렵부터는 왕실(王室)에서부터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성묘(省墓)가 중요한 풍습(風習)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중국 남송(南宋=중국 송나라가 북송 멸망 후 남쪽에서 재건된 왕조로, 서기 1127년부터 1279년까지 존속했던 나라) 때부터 한식(寒食)날 불을 끄고 찬 음식(飮食)을 먹었던 금화(禁火) 풍속(風俗)이 쇠퇴(衰退)하기 시작하여, 명(明)나라(서기 1368~1644년, 약 276년) 때에는 한식(寒食) 자체가 폐지되었습니다. 그 대신 24절기(節氣) 가운데 하나인 청명(淸明)이 다시 주목(浮刻)받았으며, 청명(淸明)의 날짜도 다시 동지(冬至) 후(後) 105일로 환원(還元) 되었습니다. 중국(中國)에서는 한식(寒食)이 큰 명절(名節)이어서 잔치를 벌이고 투계(鬪鷄=닭끼리 싸움을 붙임)나 공치기, 그네뛰기 같은 옥외(屋外)에서 하는 놀이를 즐겼습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중국 주나라 동주<동주> 시기의 전반부로, 서기전 770년부터 서기전 403년까지 약 370년 동안 이어진 시대) 제(齊)나라(기원전 1046년~기원전 221년)에서는 한식(寒食)을 ‘냉절(冷節)’ 또는 숙식(熟食)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식(寒食)의 유래(由來)에는 두 가지 설(說)이 전해집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의 인물(人物)인 개자추(介子推) 또는 개지추(介之推)와 관련된, 불을 끄고 찬 음식(飮食)을 먹는 풍습(風習)이 제도화(制度化)된 고사(故事)입니다. 개자추(介子推)에 대해 전해지고 있는 고사(故事)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중국(中國) 고대(古代) 춘추시대(春秋時代), 중국(中國) 진(晉)나라 공자(公子) 중이(重耳)는 여희(驪姬)의 모함(謀陷)과 국란(國亂)을 피해 개자추(介子推) 등 여러 신하(臣下)와 함께 국외(國外)로 망명(亡命), 유랑(流浪)하면서 떠돌아다녔습니다. 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는 줄곧 중이(重耳)를 따르며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가장 큰 빈궁(貧窮=가난하여 생활이 어려움)에 처하여 굶주려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구워 먹여 공자(公子) 중이(重耳)를 살렸다고 합니다. 훗날, 공자(公子) 중이(重耳)는 마침내 진(晉)나라 왕, 즉 진문공(晉文公=재위 기원전 636~628년)으로 즉위하여 과거 자신을 따랐던 충신(忠臣)들에게는 모두 포상(褒賞)했지만, 정작 개자추(介子推)는 잊어버렸습니다.
이때 과거 문공(文公)이 굶주렸을 때 자기 허벅지 다리 살을 베어서 바쳤던, 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가 이 포상자(褒賞者) 중에 들지 못하자, 많은 사람들이 개자추(介子推)에게 임금을 만나 상(賞)을 요구하라고 하였지만 개자추(介子推)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홀어머니와 함께 면산(綿山)에 은둔(隱遁)해 버렸습니다. 왕위에 오른 진(晉) 문공(文公) 중이(重耳)가 이 이 소문을 듣고 뒤늦게 잘못을 뉘우치고 개자추(介子推)의 은덕(恩德)을 생각하여, 개자추(介子推)를 찾아 높은 벼슬을 주려고 친히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개자추(介子推)를 찾았지만, 3일 밤낮이 되도록 개자추(介子推)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누군가 문공(文公) 중이(重耳) 에게 산에 불을 지르면 개자추(介子推)가 참지 못하고 나올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문공(文公)이 산에 불을 질렀지만, 개자추(介子推)는 벼슬을 마다하고 면산(綿山)의 산중에 숨어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진(晉) 문공(文公)은 개자추(介子推)를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介子推)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노모(老母)인 홀어머니와 함께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죽고 말았습니다. 진(晉) 문공(文公) 중이(重耳)는 개자추(介子推)가 기대고 숨져있던 버드나무 나무 구멍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 꺼내 보니 옷이 한 벌 있었는데, 거기에는 개자추(介子推)가 피로 쓴 오언고시(五言古詩)한 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개자추(介子推)가 피로 쓴 오언고시(五言古詩)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割肉奉君盡丹心, 但原主公常淸明(할육 봉군 진단심, 단원 주공 상청명), “살을 베어 군주께 바쳐 충성을 다하니, 다만 주공께서 항상 청명해지시길 바라나이다”.
柳不作鬼終不見, 强似伴君作諫臣(류불 작귀 종불견, 강사 반군 작간신), “버드나무 아래서 귀신이 되어 다시는 뵙지 못하더라도, 군주 곁에서 간언하는 신하가 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倘若主公心有我, 憶我之時常自省(당약 주공 심유아, 억아 지시 상자성), “만약 주공의 마음에 내가 있다면, 나를 기억할 때마다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시라.”
臣在九泉心无愧, 勤政淸明復淸明(신재 구천 심무괴, 근정 청명 복청명), “나는 저승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아 나라를 청명하게 하시라.”
진(晉) 문공(文公)은 개자추(介子推)가 피로 쓴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옷소매 속에 넣었습니다. 그는 개자추(介子推)와 그의 모친(母親) 시신(屍身)을 각각 그 버드나무 아래에 안장(安葬) 해 주었습니다. 개자추(介子推)를 크게 애도(哀悼)하기 위하여, 진(晉) 문공(文公)은 면산(綿山)을 ‘개산(介山)’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곳에 사당(祠堂)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불에 타죽은 사람에게 더운밥을 주는 것은 도의(道義)에 어긋난다고 하여, 산에 불을 질렀던 그날을 한식절(寒食節)로 정(定) 하고 이날만큼은 불을 금(禁)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불을 금(禁)하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風俗)이 생겨 ‘한식(寒食)’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진(晉) 문공(文公)은 신하(臣下)들과 함께 소복(素服=하얗게 차려입은 옷, 흔히 상복으로 입음, 흰옷)을 입고 걸어서 산에 올라, 개자추(介子推)에게 제사(祭祀)를 올리며, 애도(哀悼)를 표했습니다. 개자추(介子推)의 묘(墓) 앞에 와 보니 그 버드나무는 다시 살아 무성하게 자란 나뭇가지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진(晉) 문공(文公)은 다시 살아난 늙은 버드나무를 바라보며 생전(生前=살아있는 동안)에 살아있는 개자추(介子推)를 보는 듯하였다. 그는 정중하게 버드나무 앞으로 다가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서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 머리에 썼습니다. 제사(祭祀)를 마친 후 진(晉) 문공(文公)은 다시 살아난 늙은 버드나무를 “청명류(淸明柳)”라 명명(命名=사람, 사물, 사건 따위에 이름을 지어 붙임) 하였고, 이날을 청명절(淸明節)로 정(定)하였습니다. 이후 진(晉) 문공(文公)은 개자추(介子推)가 피로 쓴 한시(漢詩)를 늘 가까이 두고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는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진(晉) 문공(文公)은 근면(勤勉)하고 청명(淸明)하게 정치(政治)를 하였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나라를 아주 잘 다스렸다는 고사(故事)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식(寒食)에 대한 또 다른 유래(由來)는 고대(古代)의 종교적(宗敎的)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매년(每年) 봄에 나라에서 신화(新火=새 불)를 만들어 쓸 때 그에 앞서 어느 기간 동안 묵은 불(舊火)을 일절 금(禁)하던 예속(禮俗=예의범절에 관한 풍속), 즉 개화(改火) 의례(儀禮)에서 비롯되었다는 설(說)입니다. 원시(原始) 사회(社會)에서는 모든 사물(事物)에 생명(生命)이 있다고 여겼으며 생명(生命)은 오래되면 소멸(消滅)하기 때문에, 주기적(週期的) 갱생(更生)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오래된 불은 생명력(生命力)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人間)에게도 나쁜 영향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오래 사용한 불을 끄고 새 불을 만들어 사용하는 개화(改火) 의례(儀禮)를 주기적(週期的)으로 거행(擧行) 했는데, 한식(寒食)은 바로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점화(點火)하기 전까지의 과도기(過渡期)란 설명입니다. 또한 한식(寒食)이 동지(冬至) 후 105일째 되는 날로 정해진 것은, 고대(古代) 중국(中國)에서 하늘을 28개 구역으로 나눈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불을 관장(管掌)하는 심성(心星=이십팔수의 다섯 번째 별, 동쪽에 있음)이 이 시기에 출현(出現)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울러 개자추(介子推)의 죽음 이야기는 단순한 충절(忠節) 고사(故事)가 아니라, 묵은 불을 끄고 제물(祭物)을 태우는 고대(古代) 제의적(祭儀的) 관습(慣習)을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解釋)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식(寒食)의 기원(起源)을 설명하는 데에는 개화(改火) 의례(儀禮)와 관련짓는 후자의 설(說)이 개자추(介子推) 고사(故事) 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3. 한식(寒食)의 또 다른 유래(由來)-청명절(淸明節)과의 관련성.
한식(寒食)은 개자추(介子推)의 충절(忠節)과 비극적(悲劇的)인 최후(最後)를 기리기 위해 불을 금(禁)하고 찬 음식을 먹게 되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비롯되었다는 설(說) 외에도, 청명절(淸明節)과 관련된 풍속(風俗)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中國)에서는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이 국가(國家) 차원의 제례(祭禮)와 풍속(風俗)으로 제도화(制度化) 되었습니다. 또한 중국(中國)에서는 청명절(淸明節)을 답청절(踏靑節=들판 나들이), 행청절(行淸節), 삼월절(三月節), 제조절(祭祖節)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절기(節氣)는 중춘(仲春=봄이 한창일 때 음력 2월로 경칩<驚蟄>과 춘분<春分>을 포함하는 기간) 과 모춘(暮春=음력 3월로 봄의 끝) 사이며, 춘분(春分) 후 15일째 되는 날입니다.
중국(中國)에서 청명절(淸明節)은 개자추(介子推)의 충절(忠節)을 기리는 동시에, 봄철 농경(農耕)의 시작을 알리는 국가적(國家的) 행사(行事)로 자리 잡아 춘절(春節=음력 1월 1일 설날), 단오절(端午節=음력 5월 5일), 중추절(仲秋節=음력 8월 15일 추석)과 함께 중국(中國) 4대 전통 명절(傳統名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히 청명절(淸明節)은 단순히 개자추(介子推)를 기리는 날을 넘어, 농경 사회(農耕社會)에서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농사(農事) 준비를 결합(結合)한 종합적 절기(節氣)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청명절(淸明節) 무렵에 조상(祖上) 묘(墓)를 찾아 성묘(省墓)하고 제사(祭祀)를 지내는 풍습(風習)이 있었는데, 이때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飮食)을 먹는 습관(習慣)이 함께 전해졌다고 합니다.
4.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의 차이점.
(1). 한식(寒食).
①. 한식(寒食)의 유래(由來).=한식(寒食)의 기원(起源)은 본래 중국(中國)의 춘추시대(春秋時代) 개자추(介子推) 고사(故事)에서 비롯된 명절(名節)로, 불을 금(禁)하고 찬 음식을 먹은 풍습(風習)에서 유래(由來)되었습니다. 또한 한반도(韓半島)에서는 조상(祖上) 묘(墓)를 찾아서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중심(中心)으로 전승(傳承) 되었습니다.
②. 한식(寒食)의 풍속(風俗).=불 사용 금지, 찬 음식(飮食) 섭취,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③. 한식(寒食)의 의미.=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의 충절(忠節)을 기리고 조상추모(祖上追慕).
④. 한식(寒食)의 시기(時期).=청명(淸明) 절기(節氣)와 가까운 동지(冬至)를 지나고 음력(陰曆) 105일째 되는 날.
⑤. 오늘날 한반도(韓半島)에서 한식(寒食)은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중심(中心)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불 사용을 금지하는 옛 풍습(風習)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한식(寒食)은 청명절(淸明節)과 맞물려 조상(祖上)의 묘(墓)를 찾아 성묘(省墓)하고 제사(祭祀)를 지내며, 찬 음식(飮食)을 나누어 먹는 풍습(風習)이 결합(結合)된 명절(名節)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한반도(韓半島)에서도 한식(寒食)은 청명(淸明)과 가까운 날에 지내는 경우가 많아, 조상(祖上)에 대한 추모(追慕)와 효(孝)의 전통(傳統)을 이어가는 중요한 날로 인식(認識)됩니다. 결국 한식(寒食)은 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를 기리는 의미와, 청명절(淸明節)과 연결된 성묘(省墓) 풍습(風習)이 함께 어우러져 오늘날까지 전승(傳承)된 명절(名節)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청명(淸明).
①. 청명(淸明)의 유래(由來).=절기(節氣)상 봄에 해당하고, 날씨가 맑고 따뜻해 농사(農事)일의 시작과 성묘(省墓) 풍습(風習)이 결합(結合)한 절기(節氣). 또한 24절기(節氣) 중 하나이며, 봄 농사(農事)와 밀접(密接)한 절기(節氣)이기도 합니다.
②. 청명(淸明) 절기(節氣)의 풍속(風俗).=성묘(省墓), 제사(祭祀), 일 년 농사(農事) 준비, 가족(家族)들과 함께 봄나들이.
③. 청명(淸明)의 의미.=조상(祖上) 묘(墓)를 찾아서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농경(農耕) 사회(社會)의 풍년(豊年) 기원(祈願). 특히 농경 사회(農耕社會)에서 봄 농사(農事)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절기(節氣)입니다.
④. 청명(淸明) 절기(節氣) 시기(時期).=24절기(節氣) 중 하나이며, 매년(每年) 양력(陽曆) 4월 4~6일이며, 한식(寒食)과 같은 날 또는 하루 전에 들게 됩니다.
⑤. 오늘날 한반도(韓半島)에서 청명절(淸明節)은 양력(陽曆)과 음력(陰曆) 모두 봄에 해당하는 절기(節氣)로, 맑고 따뜻한 날씨 덕분에 농사(農事)일을 시작하기 좋은 시기로 여겨집니다. 또한 청명(淸明)은 조상(祖上) 묘(墓)를 찾아서 성묘(省墓)하고 제사를 지내는 제사일(祭祀日)로 인식(認識)되고 있으며, 봄나들이와 일 년 농사(農事) 준비와도 연결됩니다. 특히 절기적(節氣的) 성격(成格)이 강한 청명(淸明)은 성묘(省墓)와 농사(農事) 준비가 결합(結合)된 날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늘날 한반도(韓半島)에서는 명절(名節)인 한식(寒食)과 청명(淸明) 절기(節氣)가 사실상 성묘(省墓)와 제사(祭祀)의 날로 함께 이어져, 조상(祖上) 추모(追慕)와 효성(孝誠)을 실천하는 의미가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경주시 평야 한가운데 자리한 원형 봉분, 신라 제26대 진평왕릉(眞平王陵)입니다.
♣사적(史跡=역사상 중대산 시절) 제180호,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보문동(普門洞)
진평왕릉(眞平王陵).
진평왕(眞平王)은 신라(新羅) 제26대 임금으로 재위(在位=임금 자리에 있던 기간)는 579~632년입니다. 진평왕(眞平王)은 신라(新羅) 제24대 왕인 진흥왕(眞興王=재위 540~576년)의 장손(長孫=큰아들)으로 작은아버지인 신라(新羅) 제25대 진지왕(眞智王=재위 576~579년)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진평왕(眞平王)이 하늘로부터 옥대(玉帶=예전에, 벼슬아치가 공복에 두르던, 옥으로 만들어진 띠)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전해지고 있습니다. 진평왕(眞平王)은 54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고구려(高句麗)의 공격에 맞섰고, 고대 중국(中國) 수(隋), 당(唐)나라와 수교(修交=나라와 나라 사이에 외교관계를 맺음)하였으며, 여러 승려(僧侶=스님)를 중국(中國)으로 유학(留學) 보내는 등 불교진흥(佛敎振興)에도 힘썼습니다. 당시 신라(新羅)의 수도였던 경주(慶州) 남산(南山)의 북쪽에 남산산성(南山山城)을 쌓고 명활산성(明活山城=경상북도 경주시 명활산(明活山)에 있는 신라 때의 산성. 왜구를 막기 위하여 돌로 쌓은 것으로, 사적 47호이다)을 고쳐 쌓는 등의 수도 방어를 강화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진평왕(眞平王)이 사망했을 때 한지(漢只)에 장사(葬事=죽은 사람을 땅에 묻거나 화장함)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진평왕(眞平王)의 왕릉(王陵)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렸고, 둘레돌로 자연석(自然石)을 상용하였으나 현재는 자연석(自然石)으로 만든 둘레 돌의 일부가 밖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왕릉(王陵)의 위치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가지의 동쪽 명활산(明活山)과 신라(新羅) 제18대 임금인 실성왕(實聖王=재위 402~417년) 12년(413년)부터 ‘신유림(神遊林)’이라 불리며 성스러운 산으로 여긴 낭산(狼山) 사이의, 경주시(慶州市) 보문동(普門洞) 들녘에 있습니다. 낭산(狼山) 북동(北東)쪽 들녘의 이름이 한지원(閑地原)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 무덤을 진평왕릉(眞平王陵)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신라(新羅)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은 고대 삼국(三國)의 최초 여왕(女王)이자 한국(韓國) 역사상(歷史上) 가장 유명(有名)한 여성(女性) 지도자 중 한 분인 신라(新羅)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아버지입니다. 참고로 진평왕릉(眞平王陵)은 명활산(明活山) 산 아래쪽에, 선덕여왕왕릉(善德女王王陵)은 진평왕릉(眞平王陵) 맞은편에 보이는 경주(慶州) 낭산(狼山)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비하게도 진평왕(眞平王)과 선덕여왕(善德女王) 즉 부여(父女)가 죽어서도 서로 마주 보면서 영면(永眠)하고 있습니다. ☻자료 출처=사적(史跡=역사상 중대산 시절) 제180호,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보문동(普門洞) 진평왕릉(眞平王陵) 현지 안내문을 참고로 하여 새롭게 편집.


5. 한식(寒食) 풍습(風習).
(1). 한반도(韓半島)에 전해져 오는 한식(寒食) 풍습(風習).
한반도(韓半島)에 전해 내려오는 한식(寒食) 풍습(風習)은 중국(中國)의 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의 설화(說話)와 청명절(淸明節) 풍습(風習)에서 비롯되었으나, 점차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중심(中心)으로 한 명절(名節)로 자리 잡았습니다. 본래 중국(中國)에서는 한식(寒食)날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飮食)을 먹는 습관(習慣)이 있었고, 한반도(韓半島)에서는 옛날부터 설날,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한식(寒食)을 4대 절사(節祀=철 명절을 따라 지내는 제사)로 삼아 조상(祖上) 묘(墓)를 찾아 성묘(省墓)했습니다. 특히 한식(寒食)과 추석(秋夕) 무렵에는 교외(郊外)로 향하는 인파(人波)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때 조상(祖上) 묘(墓)를 찾아가 풀을 베고 묘(墓)를 정돈(整頓)하며 성묘(省墓)하고 제사(祭祀)를 지내는 풍습(風習)은 조상(祖上)에 대한 효성(孝誠)과 추모(追慕)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식(寒食)날 성묘(省墓)하는 습속(習俗=습관이 된 풍속)은 중국(中國) 당(唐)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반도(韓半島)에 한식(寒食) 풍습(風習)이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三國時代) 특히 신라 시대(新羅時代) 무렵, 중국(中國) 당(唐)나라에서 성묘(省墓) 습속(習俗)이 전래(傳來)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한식(寒食) 풍습(風習)이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는 기록이 존재(存在)합니다. 신라(新羅) 사회(社會)에서 한식(寒食)은 조상(祖上) 제사(祭祀)와 성묘(省墓), 묘지(墓地) 관리(管理)의 하나인 개사초(改莎草=무덤에 잔디를 갈아입히는 일)와 결합(結合)되어 중요한 세시풍속(歲時風俗)으로 발전했습니다. 이후 고려(高麗) 조선 시대(朝鮮時代)에 이르러 한식(寒食)은 성묘(省墓), 제사(祭祀), 농사(農事)와 연관된 중요한 명절(名節)로 발전했습니다.
(2). 삼국시대(三國時代)와 고려(高麗), 조선(朝鮮) 한식(寒食)과 청명(淸明) 풍습(風習).
한반도(韓半島)에서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은 중국(中國)의 전승(傳承)과 조금 다르게 이어져 왔습니다. 한식(寒食)은 삼국시대(三國時代)인 신라 시대(新羅時代) 중국(中國) 당(唐)나라에서 성묘(省墓) 습속(習俗)이 들어오면서 자리 잡았고, 고려 시대(高麗時代)에 성묘(省墓)와 사초(莎草) 풍습(風習)이 제도화(制度化)되면서 국가적(國家的) 행사(行事)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려(高麗)에서는 나라에서 종묘(宗廟)와 각 능원(陵園)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형벌(刑罰) 금지 등 국가 차원에서 관리했습니다. 또한 한식(寒食)을 설,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국가적(國家的) 명절(名節)로 인정(認定)되었습니다. 이러한 한식(寒食)의 풍습(風習)은 조선 시대(朝鮮時代)로 계승(繼承) 되면서, 성리학적(性理學的) 사회(社會) 분위기 속에서 조상(祖上) 숭배(崇拜)와 효(孝)를 강조하면서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풍습(風習)이 강화되었습니다. 특히 성리학적(性理學的) 가치(價値)와 농경(農耕) 사회(社會)의 특성이 결합(結合) 되어 민간(民間) 중심(中心)의 풍습(風習)으로 발전하였으며, 성묘(省墓)와 개사초(改莎草=묘지 관리)가 일반화되어 가정(家庭)과 문중(門中) 단위에서 성대하게 행해지면서 대중화(大衆化)되었습니다.
또한 한식(寒食)은 농사(農事)와 밀접(密接)하게 연결되어 봄 농사(農事) 시작을 알리는 절기(節氣)로 기능(機能)하였고, 청명(淸明)과 함께 농경(農耕) 사회(社會)의 절기(節氣)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만 한식(寒食) 풍습(風習) 중 하나인 불 사용 금지와 찬 음식(飮食)을 먹는 풍습(風習)은 점차 약화하였으며, 성묘(省墓), 제사(祭祀) 중심으로 변화(變化)하였습니다. 결국 한식(寒食)은 성리학적(性理學的) 조상(祖上) 숭배(崇拜)와 농사(農事)와의 결합(結合) 속에서 설,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4대 명절(名節)로 확립되었습니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한식(寒食) 풍습(風習)은 성묘(省墓), 제사(祭祀), 개사초(改莎草)와 결합(結合)해 설,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4대 명절(名節)로 발전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고려(高麗)가 국가적(國家的) 제도적(制度的) 성격(成格)이 강했다면 조선(朝鮮)은 성리학적(性理學的) 민간(民間) 중심 성격(成格)이 두드러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즉 한식(寒食)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들어와 고려(高麗)에서 제도화(制度化)되었고, 조선(朝鮮)에서는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중심(中心)의 풍속(風俗)으로 발전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특히 조선 시대(朝鮮時代)에는 한식(寒食)날 불을 사용하지 않는 풍습(風習)이 점차 줄어들고,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중심으로 한식(寒食) 풍습(風習)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한식(寒食)날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飮食)을 먹는 풍습(風習)은 거의 사라졌지만, 조상(祖上) 묘(墓)를 돌보는 성묘(省墓) 전통(傳統)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한식(寒食) 무렵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식(寒食)날에는 불을 사용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 둔 찬 음식(飮食)과 떡 과일 등을 즐겨 먹었습니다. 또 한식(寒食)날에 비가 내리면 개자추(介子推)의 혼(魂)을 기리는 것이라 하여 기껍게(탐탁하여 마음이 기쁘다) 여겼습니다. 한편, 한식(寒食)날을 전후(前後)해서 나무 심기에 알맞은 날씨가 이어지므로 산이나 조상묘소(祖上墓所) 근처에 나무를 즐겨 심는 풍습(風習)도 있었습니다. 한식(寒食)날 대표 음식(飮食)으로 진달래꽃을 따서 술을 담근 두견주(杜鵑酒)는 기침에 효험(效驗)이 있다고 믿었으며, 약밥이나 찬밥을 지어 먹거나 쑥을 뜯어 쑥떡을 빚고 쑥국을 끓여 먹기도 했으며, 진달래꽃을 이용한 화전(花煎)을 즐겨 부쳐 먹었으며 봄철 나물과 곡식(穀食)을 활용한 절기(節氣) 음식(飮食)이 많았습니다. 특히 한식(寒食)날에 먹는 메밀국수를 ‘한식면(寒食麵)’이라고 하여 별미(別味)로 여겼습니다. 또한 한식(寒食)과 관련된 속담(俗談)도 전해지는데, “한식(寒食)에 죽으나 청명(淸明)에 죽으나”라는 재미있는 속담(俗談)도 있습니다. 이는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이 시기적으로 가까워 두 절기(節氣)를 함께 엮어 표현한 것입니다.
(3). 청명(淸明) 절기(節氣)와 풍습(風習).
삼국시대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 시대(朝鮮時代)에는 청명(淸明) 절기(節氣)가, 한식(寒食)과 날짜가 거의 겹쳐 성묘(省墓)와 개사초(改莎草)의 풍습(風習)을 사실상 한식(寒食)과 동일(同一=서로 똑같음)한 풍습(風習)이 이어지면서, 청명절(淸明節)이 독립된 큰 명절(名節)로 자리 잡지는 못하였습니다. 특히 청명(淸明)은 농사(農事)의 시작과 연결되어 농경(農耕) 사회(社會)에서 매우 중요한 절기(節氣)로 인식(認識)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성묘(省墓)와 개사초(改莎草)를 함께 보내는 경우가 많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농사(農事) 준비와 나무 심기 풍습(風習)이 존재(存在)합니다.
(4). 고려 시대((高麗時代) 한식(寒食) 풍습(風習).
고려(高麗) 때부터 한식(寒食)은 단순히 불을 끄는 날이 아니라 조상(祖上) 묘(墓)를 찾아가 풀을 베고 손질하는 날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특히 고려(高麗) 사회(社會)에서 한식(寒食)은 설,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대표적인 세시풍속(歲時風俗) 명절(名節) 가운데 하나로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한식(寒食)날에는 나라에서 종묘(宗廟)와 각 능원(陵園=왕과 왕족의 무덤 및 그 부속시설)에 제향(祭享=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을 올리고, 관공리(官公吏)들에게 휴가(休暇)를 주어 성묘(省墓) 하도록 했으며, 또한 한식(寒食)날에는 죄수(罪囚)에 대한 형벌 집행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거나 면제하는 금형(禁刑)의 관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도적(制度的) 풍습(風習)에서 비롯되어 민간(民間=서민들)에서는 한식(寒食)날 산소를 돌보고, 추석(秋夕)이나 설날과 같이 술(酒), 과일(實果), 포(脯), 떡, 탕(湯) 등을 마련해 제사(祭祀)를 지내는데 이를 절사(節祀=절기나 명절에 따라 지내는 제사)라 불렀습니다. 한편, 농가(農家)에서는 한식(寒食)날을 맞아 논밭을 갈고 이른 농작물(農作物)의 씨를 뿌리며 농사(農事)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고려 시대((高麗時代)에도 여전히 한식(寒食)날에는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飮食)을 먹는 풍습(風習)이 이어졌습니다.





(5). 조선 시대(朝鮮時代) 한식(寒食) 풍습(風習).
조선 시대(朝鮮時代)에도 한식(寒食)은 설,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더불어 중요한 명절(名節)로 지켜졌습니다. 한식(寒食)을 글의 주제(主題)로 한 많은 시(詩)가 전해지는 사실만 보아도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한식(寒食)에는 금화(禁火)와 개화(改火)의 풍습(風習)이 있었는데, 조선(朝鮮) 제4대 임금인 세종(世宗) 13년(1431년)에는 한식(寒食) 사흘(4일) 동안 불의 사용을 금지하라는 왕명(王命)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매년(每年) 임금은 내병조(內兵曹=조선 시대, 궁궐 안에 설치되어 시위(侍衛)와 의장(儀仗)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 병조 관리들의 출장소로, 경복궁에는 근정문(勤政門) 밖에, 창덕궁에는 호위 청 서쪽에, 경희궁에는 건명문(建明門) 밖 동편에 각각 설치되었다)에서 바친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에 구멍을 뚫고 삼(대마<大麻>=삼 과(科)에 속하는 일년생 초본식물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섬유를 얻기 위해 재배되는 대마(大麻)를 말함)으로 꼰 줄을 꿰어 양쪽에서 톱질하듯 비벼 불씨를 얻은 뒤, 홰(화톳불을 놓는 데 쓰는 물건. 싸리, 갈대, 또는 노간주나무 따위를 묶어 불을 붙여서 밤길을 밝히거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다)에 불을 붙여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은 그 불씨를 궁중(宮中)의 관청(官廳)과 대신들 집에 나누어주는 풍습(風習)이 있었습니다. 각 지방의 수령(首領)들은 이 불을 받아 백성(百姓)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때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에 불이 없는 날을 한식(寒食)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불의 위력(威力)을 소중하고 신성(神聖)하게 여기고 숭배(崇拜)하는 사상(思想)의 전승(傳承)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한식(寒食)의 풍속(風俗)은 흔히 절기(節氣) 청명(淸明)의 풍속(風俗)과 혼동(混同)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조상(祖上) 숭배(崇拜) 사상(思想)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날 조선(朝鮮) 왕실(王室)에서는 종묘(宗廟)와 능원(陵園=왕이나 왕비의 무덤인 능<陵>과 왕세자나 왕세자빈 같은 왕족의 무덤인 원(園)을 통틀어 이르는 말)에 제향(祭享=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을 올리고, 종묘(宗廟)에서 제외되었거나 후손(後孫)이 없는 왕(王)과 비(妃), 빈(嬪)의 묘(墓)를 찾아 성묘(省墓)하며 훼손(毁損) 되거나 허물어진 능묘(陵墓)를 보수(補修)했습니다.
(6).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기록(記錄)된 한식(寒食) 풍습(風習).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 후기 학자 홍석모<洪錫謨=1781~1857>가 1849년에 편찬한 책으로, 조선 시대 세시풍속인 명절과 절기, 풍속, 놀이, 음식, 의례 등을 월별로 정리해 기록한 책)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청명(淸明)에는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임금은 이 불을 정승(政丞), 판서(判書), 문무백관(文武百官)과 360 고을의 수령(首領)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를 사화(賜火)라 불렀습니다. 수령(首領)들은 한식(寒食)에 다시 이 불을 백성(百姓)에게 나누어 주었고, 백성(百姓)들은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 음식(飮食)을 먹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날을 ‘한식(寒食)’이라 불렀습니다. 온 백성(百姓)이 한 불을 씀으로써 같은 공동체(共同體)라는 의식(儀式)을 다졌던 것입니다. 불은 꺼지기 쉬웠기 때문에 이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운반하기 위해 장화통(藏火筒=불씨 통)에 담았습니다. 장화통(藏火筒)은 뱀이나 닭 껍질로 만들어 습기(濕氣)와 바람에 강하게 했으며, 불씨는 은행(銀杏)이나 목화(木花) 종자(種子)를 태운 재에 묻어 보온력(保溫力)을 높여 팔도(八道=우리나라 전체를 이르는 말. 곧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7).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나타난 한식(寒食) 풍습(風習).
조선 시대(朝鮮時代)에 승정원(承政院)에서 취급(取扱)한 문서(文書)와 사건(事件)을 기록(記錄)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인조(仁祖) 원년(元年=임금이 즉위한 해, 1623년)부터 고종(高宗) 31년(1894년)까지 272년간의 기록이 전해지며, 20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世界記錄文化遺産)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인조(仁祖=조선 16대 임금) 4년(1626년)의 기록(記錄)을 보면 “본 도감(都監)의 군병(軍兵)들은 매달 3일과 9일에 모여 진법(陳法)을 연습(演習)하는 것이 정식인데, 오는 9일은 한식(寒食)입니다. 군병(軍兵)들이 모두 부모(父母)의 산소에 가 제사(祭祀)를 올리고 싶어 하니, 그들의 소원(所願)대로 이달 9일에는 진법연습(陳法演習)을 하지 말고 제사(祭祀)를 지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는 상소(上疏)가 있었고, 임금이 이를 수락(受諾)했다는 기록(記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설, 단오(端午), 한가위와 더불어 4대 명절(名節)의 하나인 한식(寒食)은 계절적(季節的)으로는 한 해 농사(農事)가 시작되는 시기이자, 겨우내 무너져 내린 무덤의 봉분(封墳)을 보수(補修)하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식(寒食)은 단순한 명절(名節)을 넘어 조상(祖上) 제사(祭祀)와 성묘(省墓) 그리고 농경(農耕) 사회(社會)의 생활(生活) 리듬을 함께 반영한 중요한 풍습(風習)이었습니다.
(8). 조선 시대(朝鮮時代) 민간(民間=일반서민들)의 한식(寒食) 풍습(風習)과 절사(節祀).
조선 시대(朝鮮時代) 민간(民間=일반서민들)에서는 한식(寒食) 무렵에 술(酒), 과실(實果=과일), 포(脯), 식혜(甘酒), 떡(䭏), 국수(麵), 탕(湯), 전(煎) 등 다양한 음식(飮食)을 마련하여 제사(祭祀)를 지냈습니다. 이를 명절제사(名節祭祀), 곧 절사(節祀)라 불렀습니다. 이날에는 여러 가지 술과 과일(酒果)을 준비하여 조상(祖上)의 묘(墓)를 찾아 성묘(省墓)하고, 묘(墓)가 훼손(毁損)된 그곳을 고치거나 다듬어 개수(改修) 하거나 주위에 나무를 심고 정돈(整頓) 작업도 하며 식수(植樹)도 했고, 잔디를 새로 입히는 개사초(改莎草=잔디를 새로 입힘)를 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조상(祖上)의 묘(墓)가 멀리 있어 직접 찾아가기 어려울 때는 묘(墓)지가 제사(祭祀)를 대신해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농가(農家)에서는 한식(寒食) 무렵부터 채소(菜蔬) 종자(種子)를 파종(破腫)하여 본격적인 농사(農事)철에 들어섰습니다. 또한 이날 천둥이 치면 흉년(凶年)이 들고 국가(國家)에 불상사(不祥事)가 생긴다고 믿어 매우 조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한식(寒食)은 단순히 조상(祖上)을 가리는 날일 뿐 아니라 농사(農事)의 시작을 알리고, 공동체(共同體)가 조심과 경건(敬虔)함 속에서 생활(生活)을 이어가는 중요한 풍습(風習)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9). 한식(寒食)은 조상(祖上)을 기리는 우리나라 풍속(風俗).
우리나라에서는 한식(寒食)은 청명(淸明)과 가까운 날에 지내졌기 때문에 명절(名節)과 절기(節氣)가 사실상 함께 이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성묘(省墓) 풍습(風習)은 청명(淸明)과 한식(寒食) 모두에서 행해졌습니다. 중국(中國)에서는 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의 전설(傳說)과 청명절(淸明節) 풍습(風習)이 중심(中心)이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풍습(風習)이 강조되며 조상(祖上)에 대한 효성(孝誠)과 농경(農耕) 사회(社會)의 풍년(豊年) 기원(祈願)이 결합(結合)된 명절(名節)로 발전했습니다. 한식(寒食)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그리고 조선 시대(朝鮮時代)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명절(名節)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退色)되어 특별(特別)한 행사(行事) 없이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반도(韓半島)에서는 한식(寒食)이 과거처럼 불을 금(禁)하고 찬 음식(飮食)을 먹는 전통(傳統) 풍습(風習)은 점차 사라졌으며, 요즘은 특별(特別)히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오늘날 한식(寒食)은 주로 성묘(省墓)와 제사일(祭祀日)로 기념(記念)되며, 청명(淸明)과 함께 조상(祖上) 숭배(崇拜)와 관련한 많은 행사(行事)가 과거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식(寒食) 무렵이면 대부분의 가정(家庭)에서 사당(祠堂)에서 제사(祭祀)를 지낸 뒤, 가족(家族)들이 조상(祖上) 묘(墓)를 찾아가 풀을 베고 묘(墓)를 정돈(整頓)하며 간단한 제사(祭祀)를 올립니다. 서울 지역에서는 제사(祭祀)에 앞서 먼저 산신제(山神祭)를 지내기도 합니다. 성묘(省墓)의 대상(對象)은 기제사(忌祭祀=해마다 사람이 죽은 날에 지내는 제사)를 받는 조상(祖上)들뿐만 아니라, 기제사(忌祭祀를 모시지 않는 먼 조상(祖上)이나 후손(後孫)이 없는 이들도 포함됩니다. 또한 한식(寒食)날은 귀신(鬼神)이 움직이지 않는 날로 여겨 묘(墓)를 손봐도 탈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산소에 개사초(改莎草=무덤에 잔디를 새로 입힘) 하거나 비석(碑石=무덤 앞에 세우는 돌) 또는 상석(床石=무덤 앞에 놓는 제사상 역할을 하는 돌)을 세우고 때로는 이장(移葬=무덤을 옮김)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조상(祖上)에 대한 효성(孝誠)과 추모(追慕)의 뜻을 담은 행위였습니다.
한편, 한식(寒食)은 일 년 농사(農事)를 준비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농가(農家)에서는 한식(寒食)이 봄철 농사(農事) 준비와 맞물려 있어, 한해의 풍년(豊年)을 기원(祈願)했습니다. 또 농사(農事)일에 이용하는 소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소를 부려보고, 볍씨를 담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농작물(農作物) 종자(種子)를 파종(破腫)하면 씨가 말라죽거나 새가 파먹는 고초일(枯焦日=예전에, 책력으로 오행<五行>을 풀어 길흉을 매기던 날의 하나, 이날에 씨앗을 뿌리면 씨앗이 말라 싹이 트지 않는다고 한다)이라 하여 종자(種子)를 파종하지 않았습니다. 강원도(江原道) 지역에서는 과일나무의 벌어진 가지 사이로 돌을 끼워 넣는 ‘과일나무 시집보내기’ 풍습(風習)이 있었는데, 이는 열매가 잘 열리기를 바라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한식(寒食)날의 날씨를 살펴 그해 농사(農事)의 풍년(豊年)과 흉년(凶年)을 점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한식(寒食)날 하늘이 맑고 바람이 잔잔하면 시절(時節=계절)이 순조롭고, 농사(農事)는 풍년(豊年)이 들며, 어촌(漁村)에서는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풍어(豊漁=물고기가 많이 잡힘)가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반대로 폭풍(暴風)이 불고 큰비가 내리면 흉년(凶年)과 어획량(漁獲量)이 줄어들 것이라 예견(豫見=어떤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짐작함)했습니다. 더 나아가 한식(寒食)날 새벽에 천둥이 치면 그해 늦가을 철에 서리가 일찍 내리고 저녁에 천둥이 치면 서리가 늦게 내린다는 속신(俗信)도 있었습니다.





(10).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한식(寒食) 풍습(風習).
오늘날에도 한식(寒食) 무렵에는 여전히 조상(祖上)의 묘(墓)를 찾아가 풀을 베고 정돈(整頓)하는 성묘(省墓)와 개사초(改莎草) 풍습(風習)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농촌(農村) 지역에서는 봄 농사(農事) 시작과 맞물려 성묘(省墓)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옛날처럼 한식(寒食)날 엄격하게 불을 끄는 풍습(風習)은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일부 지역에서는 상징적(象徵的)으로 불을 끄거나 미리 준비한 찬 음식(飮食)을 나누며 전통(傳統)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성묘(省墓) 후 가족(家族)이 함께 음식(飮食)을 나누는 행사(行事)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 시대(朝鮮時代)까지는 설,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중요한 4대 명절(名節)로 절사(節祀=철 명절에 따라 지내는 제사)의 의미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공휴일(公休日)로 지정되지 않아 그 위상(位相)은 낮아졌습니다. 그런데도 한식(寒食)은 조상 숭배(祖上崇拜)와 가족 공동체(共同體)의 결속(結束)을 상징(象徵)하는 중요한 세시풍속(歲時風俗)으로 남아 있습니다. 즉, 오늘날 한식(寒食)은 불을 끄고 찬 음식(飮食)을 먹는 풍습(風習)은 거의 사라졌지만, 성묘(省墓)와 개사초(改莎草)라는 조상 숭배(祖上崇拜) 의례(儀禮)는 여전히 중요한 전통(傳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가족(家族)과 공동체(共同體)를 잇는 전통(傳統)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1). 중국에 전해지는 한식(寒食) 풍습(風習).
중국(中國)에서는 한식(寒食)을 금연절(禁煙節), 냉절(冷節), 백오절(百五節) 등으로 부르며, 개자추(介子推) 고사(故事)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청명절(淸明節)과 한식절(寒食節) 모두 개자추(介子推) 고사(故事)가 연결되면서, 청명절(淸明節)과 한식절(寒食節)이 실제 기원(起源)으로 이어졌습니다. 한식절(寒食節)은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개자추(介子推)를 찾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다가, 그가 모친(母親)과 함께 불에 타 숨진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를 기려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飮食)을 섭취(攝取)하며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풍습(風習)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개자추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절기(節氣)는 한식(寒食)입니다.
춘분(春分) 후 15일째 되는 날, 음력(陰曆) 2~3월 초에 드는 청명절(淸明節) 기원(起源)은, 개자추(介子推) 사망한 다음 해에 진(晉) 문공(文公)이 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 무덤에 제사(祭祀)를 지내며, 다시 살아난 버드나무를 “청명류(淸明柳)”라 이름 붙이고 이날을 청명절(淸明節)로 정했다는 설(說)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국(中國)에 전해져 오는 청명절(淸明節) 풍습(風習)에는 성묘(省墓), 답청(踏靑=들판 나들이), 식목(植木), 연(鳶)날리기 등 놀이가 있으며, 음력(陰曆) 1월 1일 춘절(春節=설날), 음력(陰曆) 5월 5일 단오절(端午節), 음력(陰曆) 8월 15일 중추절(仲秋節=추석)과 함께 국가적(國家的), 사회적(社會的) 차원에서 중국(中國)의 4대 명절(名節)로 자리 잡았습니다. 역사(歷史)적으로는 왕조(王朝)와 지방(地方)에 따라 한식절(寒食節)의 날짜가 달랐습니다. 어떤 지역은 청명절(淸明節) 1~2일 전에 한식(寒食)을 지내기도 했고, 또 다른 지역은 24절기(節氣) 하나인 청명(淸明) 다음날을 한식(寒食)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특히 개자추(介子推)의 고사(故事)가 전해 내려오는 산서성(山西省) 지방(地方)에서는 청명절(淸明節) 하루 전날을 한식절(寒食節)로 지키고 있습니다.
중국(中國)에서는 한식(寒食)날 문(門)에 버드나무를 꽂거나 들녘에서 잡신(雜神)을 위로하는 야제(野祭)를 지내며 영혼(靈魂)을 달래는 풍습(風習)이 있었습니다. 특히 개자추(介子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비가 내리는 한식(寒食)을 ‘물한식(寒食)’이라고 불렀는데, 이날 비가 내리면 그해 농사(農事)가 풍년(豊年)이 든다는 속설(俗說)도 전해 집니다. 옛날에는 한식(寒食) 기간(期間)이 길어 30~105일 동안 불을 피우지 못하는 풍습(風習)도 있었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이날은 비바람이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習慣)에서 왔다”라는 “개자추전설(介子推傳說)”에서 비롯된 명절(名節)로, 불을 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風俗)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식(寒食)날에는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風俗)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결국 한식(寒食)은 개자추(介子推)의 충절(忠節)과 비극적(悲劇的)인 최후(最後)를 기리는 전설(傳說)에서 유래(由來)한 명절(名節)로, 이날에는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飮食)을 먹으며 그의 넋을 추모(追慕)하는 풍속(風俗)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국(中國)에서 개자추(介子推)의 고사(故事)는 한식절(寒食節)과 청명절(淸明節) 모두와 관련이 있지만, 직접적인 사건은 한식절(寒食節)에서 비롯되고, 후대의 기념(紀念)과 풍속(風俗)은 청명절(淸明節)로 확장된 것입니다.
(12). 한국(韓國)과 중국(中國)의 한식(寒食) 풍습(風習) 비교.
한국(韓國)에서 한식(寒食)은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청명(淸明)은 한식(寒食)과 겹치면서 사실상 같은 날로 인식(認識)되었으며, 불 사용을 금(禁)하는 풍습(風習)은 조선 시대(朝鮮時代)로 접어들면서 점점 약화(弱化)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식(寒食)은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중심의 절기(節氣)로 자리 잡으며 청명(淸明)과 사실상 하나의 절기(節氣)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중국(中國)에서는 한식(寒食)날에 불 사용을 엄격히 금(禁)하였고, 청명(淸明)은 성묘(省墓)와 농사(農事)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두 절기(節氣)가 결합(結合)하게 되었으며, 한식(寒食) 본래 의미인 불 사용 금지가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청명(淸明)과 결합(結合)된 성묘(省墓) 풍습(風習)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결국 중국(中國)에서는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이 서로 다른 기원(起源)에서 출발해 결합(結合)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식(寒食)이 청명(淸明)과 겹치며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중심으로 변형(變形)되어 두 절기(節氣)가 사실상 하나로 이어진 차이가 있습니다.





6. 현재 한반도(韓半島)에서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의 관계.
①. 날짜 상관성(相關性=서로 관련이 있음)과 겹침.
한식(寒食)은 동지(冬至) 이후 105일째 되는 날로, 대체로 양력(陽曆) 4월 5일 전후(前後)에 해당합니다. 반면 청명(淸明)은 24절기(二十四節氣) 가운데 하나로, 대체로 4월 4~6일 사이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은 거의 같은 시기(時期)에 겹치거나 하루 또는 이틀 차이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두 절기(節氣)가 거의 같은 시기에 겹치므로 옛날부터 성묘(省墓)와 제사(祭祀)를 함께 지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②. 풍습(風習)의 유사성(類似性).
중국(中國)에서는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이 모두 성묘(省墓)와 조상(祖上) 제사(祭祀)와 관련된 풍습(風習)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한식(寒食)은 불을 끄고 찬 음식(飮食)을 먹는 풍습(風習)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성묘(省墓)와 제사(祭祀) 중심(中心)으로 바뀌었고, 청명(淸明) 역시 성묘(省墓)와 묘지(墓地) 손질과 관련된 날로 자리 잡았습니다.
③. 한반도(韓半島)에서의 결합(結合).
한반도(韓半島)에서는 고대(古代) 삼국시대(三國時代)인 신라 시대(新羅時代)에 중국(中國) 당(唐)나라에서 성묘(省墓) 습속(習俗)이 전래(傳來)되면서 한식(寒食) 풍습(風習)이 확실히 자리 잡았는데, 이때 청명(淸明)과도 연결되어 성묘(省墓)와 개사초(改莎草) 풍습(風習)이 강화되었습니다. 고려(高麗)와 조선 시대(朝鮮時代)에는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이 사실상 같은 시기에 성묘(省墓)와 제사(祭祀)를 지내는 날로 인식(認識)되었고, 농사(農事) 시작과도 맞물려 중요한 세시풍속(歲時風俗)으로 발전했습니다.
오늘날 한반도(韓半島)에서는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이 성묘(省墓) 와 제사(祭祀)를 중심으로 하나의 절기(節氣)처럼 인식(認識)되고 있습니다. 본래 한식(寒食)은 불을 끄고 찬 음식(飮食)을 먹는 날이었으나, 이러한 풍습(風習)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대신 조상 숭배(祖上崇拜)와 농사(農事) 시작을 알리는 의미가 두 절기(節氣) 모두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성묘(省墓) 와 제사(祭祀), 개사초(改莎草) 풍습(風習)은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에서 공통적(共通的)으로 나타나며, 사실상 같은 의미로 전승(傳承)되었습니다. 과거의 찬 음식(飮食) 풍습(風習)은 역사적(歷史的) 의미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 절기(節氣)는 봄 농사(農事)의 시작과 겹쳐 농경(農耕) 사회(社會)에서는 본격적인 농사(農事) 준비를 알리는 중요한 시기로 인식(認識) 되었습니다.
한반도(韓半島) 일부 지역에서는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이 거의 같은 시기에 겹치기 때문에, 두 절기(節氣)를 함께 농사(農事) 준비와 연결해 기억합니다. 한식(寒食)날은 공휴일(公休日)로 지정되지 않아 명절적(名節的) 위상(位相)은 낮아졌지만, 여전히 조상 숭배(祖上崇拜)와 가족(家族) 공동체(共同體) 결속(結束)을 상징(象徵) 하는 날로 남아 있습니다. 최근에는 성묘(省墓)할 때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한국(韓國)에서는 한식(寒食)이 성묘(省墓)와 제사(祭祀)의 날로 더 강하게 자리 잡았고, 반면 청명(淸明)은 중국(中國) 만큼 큰 명절(名節)로 자리 잡지 못하면서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한식(寒食)과 청명(淸明) 등 두 절기(節氣)가 시기적으로 겹치기 때문에 성묘(省墓) 풍습(風習)이 청명(淸明)에도 이어졌고, 민간(民間)에서는 두 절기(節氣)를 같은 맥락(脈絡)에서 지냈습니다. 또한 조선(朝鮮) 후기(後期)에는 청명(淸明) 절기(節氣)에 맞춰 농사(農事) 준비와 나무 심기 같은 풍습(風習)도 일부 전승(傳承)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韓國)에서는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을 묶어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④. 한식절(寒食節)에 즐겨 먹는 시절(時節) 음식(飮食)은 봄철에 나는 쑥을 넣어 빚은 쑥떡이 있는데, 이 쑥떡에는 잡귀(雜鬼)를 막고 건강(健康)을 기원(祈願)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진달래꽃을 얹어 부친 떡 화전(花煎)은, 봄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먹던 절기(節氣) 음식(飮食)입니다. 또한 한식(寒食)날에 먹는 찬 음식(飮食)들은 원래 불을 피우지 않고 차가운 음식(飮食)을 먹는 풍습(風習)에서 비롯되었습니다.
⑤. 청명절(淸明節)에 즐겨 먹는 시절(時節) 음식(飮食).
☻. 청명주(淸明酒)가 있습니다. 청명주(淸明酒)는 봄철에 빚은 술로, 맑고 깨끗한 기운(氣運)을 기원(祈願)하면서 즐겨 마신 술입니다.
☻. 봄나물 요리는 주로 냉이, 달래, 씀바귀 등 체절 나물을 무쳐 먹으며 새 생명(生命)을 맞이했습니다.
☻. 절기(節氣) 음식(飮食) 겹침.=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은 각각 독립(獨立)된 절기(節氣)이지만, 서로 인접(隣接)해 있어 함께 묶여 언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한국(韓國)에서는 청명절(淸明節)만의 독립(獨立)된 음식(飮食)보다는, 한식(寒食)과 성묘(省墓) 풍습(風習)이 함께 겹 쳐져 같은 음식(飮食)들을 함께 먹었습니다. 즉 한국(韓國)에서는 한식절(寒食節) 음식(飮食)이 중심이 되었고, 청명절(淸明節)은 성묘(省墓)와 농사(農事) 준비의 의미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실제 생활(生活)에서는 두 절기(節氣)를 묶어 쑥떡, 진달래꽃 화전(花煎), 봄나물 같은 음식(飮食)들을 함께 즐겼습니다.





7. 한국(韓國)과 중국(中國)에서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 맥락(脈絡=어떤 일이나 사물이 서로 연관되어 이루는 줄거리).
한국(韓國)과 중국(中國)에서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이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문화사적(文化史的)으로 보면, 두 나라의 사회적(社會的) 맥락(脈絡)과 국가 제도(國家制度)의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1). 한국(韓國)의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 맥락(脈絡).
①. 성묘(省墓) 중심 전승(傳承).=한국(韓國)에서는 개자추(介子推) 고사(故事)가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대신 한식(寒食)이 중심 절기(節氣)로 자라 잡았으며, 청명(淸明)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었지만, 가문(家門) 중심의 조상(祖上) 제사(祭祀), 성묘(省墓) 풍습(風習)과 함께 묶여 전승(傳承) 되었습니다. 즉, 두 절기(節氣)가 ‘성묘(省墓)의 절기(節氣)’라는 실용적 의미로 통합되었습니다.
②. 국가적(國家的) 제도화(制度化)의 약화(弱化).=한국(韓國)에서는 청명(淸明)이 중국(中國)처럼 국가적(國家的) 명절(名節)로 제도화(制度化)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가문(家門)과 지역(地域) 공동체(共同體) 중심으로 성묘(省墓) 풍습(風習)이 이어졌습니다.
③. 농경(農耕)보다는 제사(祭祀) 중심.=청명(淸明)이 농경(農耕)과 연결된 중국(中國)과 달리, 한국(韓國)에서는 농사(農事)보다는 조상(祖上) 제사(祭祀)와 성묘(省墓)의 의미가 더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④. 절기(節氣) 음식(飮食)과 생활(生活) 풍습(風習).=쑥떡, 진달래꽃 화전(花煎), 봄나물 등 계절(季節) 음식(飮食)을 즐기며, 가족(家族) 단위의 성묘(省墓)와 공동체적(共同體的) 기억(記憶)을 강화(强化)하는 날로 이어졌습니다.
⑤. 문화적(文化的) 확장.=국가적(國家的) 명절(名節)이라기보다는 가족(家族), 공동체(共同體) 중심의 조상(祖上) 기념(記念)일로 자리 잡았고, 청명(淸明)은 한식(寒食)과 겹쳐 크게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⑥. 절기(節氣) 구분(區分).=한식(寒食)과 청명(淸明) 두 절기(節氣)를 성묘(省墓) 절기(節氣)로 묶어 인식(認識)했습니다.
(2). 중국(中國)의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 맥락(脈絡).
①. 국가적(國家的) 명절화(名節化).=중국(中國)에서 청명(淸明)은 당(唐), 송(宋) 시대(時代) 이후 국가(國家)가 인정한 중요한 절기(節氣)로 발전했습니다. 조상(祖上) 숭배(崇拜)와 성묘(省墓)뿐 아니라 봄철 농경(農耕)과 연결되어 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국가(國家) 명절(名節)로 제도화(制度化)되었습니다.
②. 공적(公的) 성격(成格) 강화(强化).=청명(淸明)은 단순히 가문(家門)의 제사일(祭祀日)이 아니라 국가(國家) 차원에서 ‘조상 숭배(祖上崇拜)’와 ‘농경(農耕) 사회(社會)의 질서(秩序)’를 제도화(制度化)하는 장치로 기능했습니다.
③. 문화적(文化的) 확장.=청명절(淸明節)은 성묘(省墓)뿐 아니라 ‘답청(踏靑=봄나들이)’ 같은 놀이, 사회적(社會的) 교류(交流), 문화(文化)와도 결합(結合)해, 생활(生活) 전반에 영향을 주는 절기(節氣)로 자리 잡았습니다.
④. 절기(節氣) 구분(區分).=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을 뚜렷하게 구분합니다.
(3). 한국(韓國)과 중국(中國)에서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 문화사적(文化史的) 핵심(核心) 차이.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은 한국(韓國)에서는 가문(家門) 중심으로 성묘(省墓) 풍습(風習)이 전승(傳承) 되면서,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이 통합되어 ‘성묘(省墓)의 날’로 인식(認識)되는 경향(傾向)이 강했습니다. 반면 중국(中國)에서는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을 국가(國家)가 주도해 공적(公的) 명절(名節)로 발전시켜, 농경(農耕), 놀이, 성묘(省墓)가 결합(結合)된 사회적(社會的) 절기(節氣)로 자리 잡았습니다. 즉 한국(韓國)은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을, 성묘(省墓) 풍습(風習) 중심→가족(家族), 공동체적(共同體的) 기억(記憶) 강화(强化)→절기(節氣) 음식(飮食)과 생활(生活) 문화(文化) 중심의 실천적(實踐的) 풍습(風習)으로 전승(傳承) 했지만, 중국(中國)은 개자추(介子推) 고사(故事)→국가적(國家的) 명절(名節) 제정(制定)→사회(社會) 전체의 농경(農耕), 제례(祭禮) 풍속(風俗) 차원에서 절기(節氣)를 제도화(制度化)한 차이가 있습니다.
(4). 한국(韓國)에서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의 역사적(歷史的) 전개(展開).
①. 삼국(三國)시대(時代)와 고려 시대(高麗時代).=삼국시대(三國時代)인 신라 시대(新羅時代)에 중국(中國) 당나라에서 절기(節氣) 풍습(風習)이 들어왔으나, 아직 뚜렷한 제도화(制度化)로 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고려 시대(高麗時代)로 전승(傳承)되면서, 한식(寒食)이 조상(祖上)의 묘(墓)를 찾아 성묘(省墓)와 개사초(改莎草), 제사(祭祀)를 올리는 풍습(風習) 중심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청명(淸明)은 한식(寒食)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弱化)되어 성묘(省墓) 풍습(風習)과 결합(結合)하게 됩니다.
②. 조선 시대(朝鮮時代).=고려(高麗)에서 조선(朝鮮)으로 전승(傳承)되면서, 성리학적(性理學的) 조상 숭배(祖上崇拜)가 강화되면서 성묘(省墓) 풍습(風習)이 제도화(制度化)됩니다. 그러나 국가적(國家的) 명절(名節)로 발전하지는 않고, 가문(家門)과 지역(地域) 공동체(共同體) 중심으로 전승(傳承)됩니다.
③. 근대 이후.=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이 “성묘(省墓)의 절기(節氣)”로 인식(認識). 농경적(農耕的) 의미는 약화(弱化)되고 조상(祖上) 제사(祭祀)와 성묘(省墓) 중심으로 전승(傳承)됩니다.
(5). 중국(中國)에서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의 역사적(歷史的) 전개(展開).
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한식(寒食)은 불을 끄고 찬 음식(飮食)을 먹는 풍습(風習)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청명(淸明)은 농경(農耕)과 조상 숭배(祖上崇拜)가 결합(結合)된 절기(節氣)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②. 한(漢), 위(魏), 진(晉) 시대(時代).=청명(淸明)이 점차 성묘(省墓)와 농경(農耕)을 아우르는 절기(節氣)로 확산합니다.
③. 당(唐), 송(宋), 남송(南宋) 시대(時代).=중국(中國) 당(唐)나라(서기 618~907년) 무렵부터는 왕실(王室)에서부터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한식(寒食) 풍속(風俗)인 성묘(省墓)가 중요한 풍습(風習)으로 자리 잡았으면서 북송(北宋)까지 한식(寒食) 풍습(風習)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송(宋)나라가 멸망하고 남송(南宋) 무렵부터 남방(南方) 중심의 문화가 강화되면서, 한식(寒食)날 불을 끄고 찬 음식(飮食)을 먹었던 금화(禁火) 풍속(風俗)이 쇠퇴(衰退)하기 시작하여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이때 한식(寒食)을 대신하여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 한식(寒食)과 함께 전승(傳承)되었던 청명(淸明)은 당(唐), 송(宋), 남송(南宋) 시대(時代)에서부터는 국가(國家)에서 청명(淸明)을 국가적(國家的) 명절(名節)로 제도화(制度化)합니다. 이때부터 청명(淸明)에도 성묘(省墓)뿐 아니라 봄나들이 놀이인 답청(踏靑), 시문 창작(時文創作), 사회적(社會的) 교류(交流)가 활발하게 확산합니다.
④. 명(明), 청(淸) 시대(時代) 이후.= 한식(寒食) 자체가 폐지되고, 대신 청명(淸明)이 성묘(省墓)와 제사(祭祀)의 대표적인 절기(節氣)의 중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후 중국(中國)에서는 청명절(淸明節)이 국가적(國家的), 사회적(社會的) 명절(名節)로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한식(寒食)은 역사적(歷史的) 풍습(風習)으로 남아 있습니다.
⑤. 근대 이후.=청명(淸明)이 농경(農耕), 놀이, 성묘(省墓)가 결합(結合)된 사회적(社會的) 절기(節氣)로 지속되어 전승(傳承)되어 오고 있습니다.
한식(寒食)과 청명절(淸明節)의 전승(傳承) 과정에서 가장 큰 차이는 한국(韓國)과 중국(中國)의 제도적(制度的), 문화적(文化的) 맥락(脈絡)에서 나타납니다. 한국(韓國)에서는 가문(家門) 중심 성묘(省墓) 실천이 한식(寒食) 중심으로 이어졌고, 이후 청명(淸明)의 성묘(省墓) 풍습(風習)과 결합(結合)하여 두 절기(節氣)가 ‘성묘(省墓)의 날’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적(國家的) 명절(名節)로 제도화(制度化)되지는 않았고, 가문(家門) 중심의 전통(傳統) 명절(名節)로 전승(傳承) 되었습니다. 반면 중국(中國)에서는 한식(寒食)과 청명(淸明)이 분리되어, 청명절(淸明節)이 국가적(國家的) 명절(名節)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농경(農耕), 놀이, 성묘(省墓)가 결합(結合)된 사회적(社會的) 절기(節氣)로 확장되며 풍부한 의미를 지닌 독립적(獨立的) 절기(節氣)로 자리 잡았습니다. 즉, 중국(中國)은 국가(國家) 제도화(制度化)와 사회적(社會的) 확장을 통해 청명절(淸明節)이 독립적(獨立的)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지만, 한국(韓國)은 가문(家門) 중심의 성묘(省墓) 실천을 통해 두 절기(節氣)를 하나로 묶어 전승(傳承)한 것이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같은 절기(節氣)라 하더라도 국가(國家) 제도화(制度化) 여부와 문화적(文化的) 확장 범위(範圍)가, 두 나라의 역사적(歷史的) 궤적을 갈라놓은 핵심(核心)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료 출처=다음 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역사 일반, 문화 일반, 하루하루가 잔치로세-역사 일반, 문화 일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 세시풍속 사전-사전, 네이버 블로그 Choi’s World(초이스)=청명절(淸明節)과 개자추(介子推) 그리고 한식(寒食), 인터넷-AI 검색.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운동 기념 공원에 활짝 핀 영산홍(映山紅) 철쭉입니다.

벌써 4월의 하순에 접어들며 봄은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른 봄에 피었던 꽃들은 이미 자취를 남겼고, 지금은 산등성이마다. 진홍빛(眞紅色) 산철쭉과 분홍빛(粉紅色) 철쭉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공원(公園)이나 식물원(植物園), 주택(住宅) 정원(庭園)과 아파트 단지 화단(花壇)에는 원예종(園藝種) 산철쭉과 영산홍(映山紅) 철쭉이 만개하여 봄날의 아름다운 청취(情趣)를 한 것 느끼게 합니다. 여기에 더해 파릇파릇 돋아나는 신록(新綠)이 계절(季節)의 싱그러움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가벼운 산책을 즐기며 봄꽃과 신록(新綠)이 어우러진 풍경(風景) 속에서 행복(幸福)한 추억을 남겨 보시는 것도 참 좋은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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