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동안 몸 담아왔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동분 서주하며 보낸 날들이 벌써 1년이 넘었다. 국제적인 금융 한파로 인하여 취업의 문은 더욱 좁아 졌다. 그냥 앉아서 좌절만 하고서 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울적한 마음과 정신적인 고통을 풀어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 해보고자 평소에 좋아하던 대관령을 찾는다. 험준한 백두대간 산줄기가 동서로 길게 누워있는 대관령에는 사계절 내내 강풍이 휘몰아친다. 추운 겨울에 불어오는 바람은 칼산에 휘몰아 치는 매운바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차갑고 매섭다. 인근 동해 바다에서 만들어진 습기를 머금고 생성된 높은 구름들이 산 능선을 넘으면서 서쪽에서 불어오는 찬 공기와 부딪치며 많은 눈을 내리게 한다. 이렇게 겨울 바람과 함께 내리는 눈은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은백색으로 물들여 놓는다. 대관령에서 선자 령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은 마치 여인의 허리선처럼 능선의 굴곡이 높낮이를 구분키 어려울 정도로 산줄기가 곱게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산봉우리가 모두 풍경이 수려하지만 강한 바람은 때때로 이곳의 겨울 풍경을 변화무쌍하게 만든다. 고갯길에서 넓은 임도를 따라서 방송 통신용 중계 탑과 무선 항공관리소가 있는 곳까지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서 올라선다. 동쪽으로 능선 곳곳에 세워진 군부대가 철거 되고 그 자리에는 생태계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성스럽게 심어 놓은 어린 나무들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둥근 통나무를 길게 일렬로 세워놓았다. 강풍을 동반한 눈바람으로부터 어린 나무를 보호하고자 방풍림 대용으로 세워 놓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모양이 꼭 유년 시절 고향 집에서 본 싸리로 만든 대문을 보는 듯하다. 무선 항공관리소에서 울창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오솔길을 따라서 세봉 전망대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언덕배기처럼 보이는 능선 오름을 올라서면 해발1050m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미니 전망대이다. 산 아래에 있는 대관령과 오늘 가고자 하는 선자 령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유난히도 파란 하늘과 동해바다로 길게 이어지는 수평선이 푸른 속살을 드러낸다. 태풍처럼 불어오는 바람도 이곳에서는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된다. 아마도 바람이 능선을 살짝 비켜 나가는 자연적인 현상이거나, 공기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방향이 있는듯하다. 능선 곳곳에는 일정한 크기의 높이로 자란 나뭇가지가 바람이 지나가는 방향으로 나란히 가지를 내린다. 작년 이맘때 이곳에서 보았고 느꼈던 아름다운 추억을 떠 올려본다. 하늘에서는 많은 눈이 내렸다. 그리고 나뭇가지 위에 내리는 눈이 쌓이면서 은색의 상고대와 눈꽃이 보여주는 잔잔한 잔영과 함께 멋진 운치를 보았다. 가끔씩 동해 바다에서 밀려오는 성난 파도처럼 하늘을 뒤덮은 짙은 운무(雲霧)가 내려앉을 때면, 눈앞에 드리워진 설경은 일순간 모두 사라져 버리고 바람이 들려주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대관령뿐이다. 그때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추억을 쫓아서 오늘 다시 여기에 선다. 금방 하늘에서 함박눈이라도 펑펑 쏟아지면 좋으련만 주홍빛의 붉은 햇살이 능선 위에 곱게 부서진다. 올해는 아쉽게도 심한 겨울 가뭄으로 인하여 예년에 비해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다. 살짝 잔설이 남아 있는 산 능선에는 황량한 겨울 풍경만 수묵화처럼 그려진다. 겹겹이 누워있는 높고 낮은 산 정상을 향해서 모든 것을 날려 버릴 듯한 기세등등한 바람이 불어온다. 추운 바람을 맞으면서 겨울을 이겨내는 나무들과 풀들을 보면서 대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을 생각해 본다. 바람의 언덕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은 백두대간 능선에 나란히 이어지는 해발1070m인 세봉 정상에 올라선다. 서쪽으로 나무 한 그루 서있지 않은 아득한 광야처럼 드넓은 초원 위에 점점이 서 있는 풍차가 이국적인 풍경을 선물한다. 이곳에는 모두 49기(基)의 친환경적인 풍력 발전기가 국내 최대로 들어서 있다. 전체 시설 용량은 국내 수력 발전소 가운데 두 번째로 큰 화천 과 비슷하고 가장 큰 소양강의 절반 정도라고 한다. 완공된 49기가 한해 생산하는 전력량은 강릉시 전체 가구의 절반 정도가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무한정으로 널려있는 풍력을 이용하여 전력을 생산 하므로 대기를 오염 시킬 물질도 배출하지 않는, 그야말로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깨끗한 에너지를 생산 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얼굴을 스치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마지막 능선 오름을 올라 선자령 정상에 선다. 차갑고 심한 바람 때문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조차 잘 자라지 못하는 이곳은 백두대간의 붐이 일면서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로 항상 이 넓은 대평원에는 발길조차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부산하다.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상상 할 수 없는 일이 실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등산은 이제 특정 단체나 개인적으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산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일반 시민들 속으로 자연스럽게 동화 되어 등산 붐이 일지 않았나 생각 된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새하얀 눈이 쌓인 산 정상에서 아름다운 설경을 보는 것은 겨울 산행의 백미이다. 저 멀리 북쪽으로 눈 덮인 곤신봉, 매봉, 소황병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파노라마 친다. 언덕 아래 서있는 풍차가 천천히 회전하며 돌아가는 날개가 꼭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서있는 귀여운 산 토끼의 귀를 보는 듯하다. 추위와 바람과 힘겨운 싸움에서 승리 한 것을 자축이라도 하는 것일까! 정상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핀다. 모두들 어린 시절 동심의 세계로 돌아 간듯하다. 오늘 함께 산행을 오신 지인들을 큰소리 부르면서 찾는다. 바람이 얼마나 찬지 몇 분을 서있지 못하게 한다. 한참을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나니 정신력마저 한계에 달한다. 겨우 지인들을 찾아서 함께 하산을 한다. 이럴 때 일수록 주의를 기울지 않고 자칫 방심을 하게 된다면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이 겨울 산행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오는 겨울 산행 길은 더욱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다. 바람에 쫓기다시피 하면서 의야지 마을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보이는 것이라곤 산비탈을 따라서 넓게 조성되어 있는 허허 벌판인 목장 초지(草地)뿐이다. 무서운 불길처럼 삼켜버릴 듯이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가누기도 힘들고 숨쉬기조차 힘들다. 이곳을 거닐면서 한가롭게 풀을 뜯던 소와 양떼들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매운바람을 피해 축사에서 따뜻한 겨울날을 보내는 듯하다. 힘겹게 사나운 바람과 싸우면서 도로를 따라서 30분 정도 내려서니 의야지 마을이다. 의야지 마을은 바람의 마을이란 애칭답게 대관령 고개 못지않은 바람이 분다. 산행을 마치고 대관령의 황태덕장을 둘러본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황태는 겨울바람이 빚어 놓은 맛이며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동해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싱싱한 명태는 그냥 먹어도 맛이 일품이다. 명태를 더 오래 저장하여 먹는 방법을 강구한 선조(先祖)들은 대관령의 바람을 지혜롭게 이용하였다. 낮과 밤의 온도의 차가 크게 나고 일정한 바람과 눈이 많이 내리는 대관령은 황태를 말리는 데는 최고의 적지이다. 밤새 바람에 꽁꽁 얼어 버린 명태가 겨우내 짧기만 한 햇살에 녹았다 얼어 버리기를 여러 번을 반복하다, 말려진 명태는 꽃피는 봄이면 노란 속살을 품고 있는 단단한 황태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대관령의 황태는 하늘과 날씨가 한 해를 좌우한다고 한다. 그런 만큼 황태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대관령의 바람과 눈이다. 바람은 때때로 사나운 폭풍우처럼 무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들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한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지나간 그 자리에는 머지않아서 겨우내 얼어 버린 대지를 녹이는 훈풍이 불어 올 것이다. 그리고 긴 잠에서 깨어난 파릇한 새싹 과 새로운 생명력을 지닌 많은 식물들이 자라 날것이다. 추운 겨울바람을 이기고 돋아난 새싹과 꽃은 더 싱그럽고 화려하다. 바람으로 인하여 황무지처럼 버려진 땅이었지만 지금 대관령에는 소와 양떼들이 자유자재로 뛰어 노는 그야말로 꿀과 젖이 흐르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하였듯이 내 삶도 그렇게 꽃피울 것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대관령에는 광풍(狂風)이 불어온다. 광풍(狂風) 못지 않게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한파가 모든 것을 어렵게 한다. 당장은 힘들고 어렵겠지만 이번 역시 외환위기 때처럼 지혜롭게 극복한다면 아마 더 윤택한 삶의 선물이 주어질 것이다. 땅거미가 내리며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가 광풍(狂風)이 아닌 새로운 희망을 여는 새벽 종소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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