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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금산사.

풀꽃사랑s 2021. 2. 22. 15:39

전북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금산사.

 

해발796m미터인 모악산(母岳山)은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이며, 노령산맥의 서단부에 위치하며 호남평야와 전라북도 동부 산간 지대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조 초기 세종(世宗)의 교지를 받아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가 편찬한 고려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高麗史)에는 ‘태조 왕건18년 을미(920년)봄 3월,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이 그의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金山)의 불우에 가두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서 고려(高麗)시대에는 모악산을 금산으로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산사지(金山寺誌)’ 기록에는 모악산은 어머니의 뫼라는 ‘엄뫼’를 의역해서 모악(母岳)이라 불렀고, 이전에는 아주 높은 태산이라는 의미를 지닌 ‘큰 뫼’라는 말을 음역하여 금산(金山)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모악산은 조선후기인 1750년 에 제작된 회화식 군현 지도인 ‘광여도(廣輿圖)’와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무악산(毋岳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성종의 명에 다라 노사신 등이 편찬한 지리와 풍속을 서술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72년 지방도에는 ‘모악산(母岳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악산은 논산시 두마면의 신도안(新都安), 경북영주시 풍기읍의 금계동(金鷄洞)과 함께 난리와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지라 하여 각종 무속 신앙의 본거지로 널리 알려져 왔다. 한국신흥종교총람(韓國新興宗敎總覽)에 의하면 약40여 개에 가까운 교단들이 있어 충남 계룡산(鷄龍山)보다 많으며 대부분 신흥종교(新興宗敎)인 증산계(甑山系)로 알려져 있다.

금산사 풀또기.

 

천년 고도인 전북 전주시에서 남쪽으로 약7㎞거리 김제평야 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모악산(해발796m)은 산의 높이가 채 일천 미터도 안 되만, 산세가 수려하고 조망이 빼어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산이다. 사면이 확 트인 정상에서면 광활한 호남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미륵 신앙의 중심지인 금산사와 귀신사, 수왕사, 대원사, 심원사 등 이름난 사찰을 품고 있어, 찬란한 불교예술을 살펴 볼 수 있는 산이기도 하다. 모악산이란 이름의 연유는 산 정상에 어미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 ‘모악’이란 이름이 붙어져 모악산으로 불리고 있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산세와 골이 깊은 모악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구이저수지, 금평저수지, 안적저수지, 불선제, 중인제, 갈마제로 흘러들고 있다. 이렇게 면적이 널찍한 저수지로 흘러들어오는 물은 광활한 호남평야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모악산 산 정상에는 큰 송신탑이 세워져 있어 정상일대가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여 왔다. 그러나 2008년부터 일반인들에게 모악산 정상을 개방함에 따라 이제는 출입의 제한이 없어지며 자유롭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모악산은 꽃피는 춘삼월이면 활짝 만개한 연분홍진달래와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며 장관을 이룬다. 모악산 서쪽 산 아래쪽에 있는 금산사(金山寺)는 통일신라시대 말에 견훤이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후백제를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호남 4경의 하나인 금산사에는 국보 제62호인 미륵전(彌勒殿)을 비롯하여 국보급의 많은 문화재가 있다. 특히 금산사 미륵전에는 높이11.82m나 되는 미륵불이 유명하게 알려져 있다. 1971년 12월 모악산을 중심으로 하여 면적42.44㎢가 모악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전라북도의 중심 위치에 있다.

 

봄이 무르익어 가는 사월 중순이면 형형색색 봄꽃 천지이다. 대구에 벚꽃과 개나리가 질 무렵이면 서해와 중부지방에는 절정을 향해 달린다. 화사하게 활짝 만개한 봄꽃들이 수줍은 듯이 봄을 손짓하는 금산사를 찾아서 길을 나선다. 모악산 관광단지 대형 버스 주차장에서 활짝 만개한 벚꽃이 꽃비가 되어 내리는 가로수 길을 10분 정도 걸어서 올라선다. 모악산 등산로 입구에 모악산 이라 쓰인 표지석이 터줏대감처럼 중앙에 버티고 앉아있다. 모악산 탐방은 고은 시인의 시비를 지나 서쪽으로 올라서며 시작 한다. 연분홍 진달래와 새하얀 벚꽃이 피는 시기에 맞추어 제9회 모악산 진달래 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래서 일까⁉.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봄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임도 길을 연상시킬 정도로 널찍한 탐방로가 시원스럽게 이어진다. 크고 작은 바위가 늘려 있는 비좁은 바위틈새에. 탐스럽게 핀 울긋불긋한 복숭아꽃이 먼 길을 찾아온 길손의 마음을 설레게 해준다. 이에 뒤질세라 산비탈에는 새하얀 꽃을 피운 벚꽃이 눈 맞춤을 한다. 전주 시내가 가까워서 일가⁉ 일가족을 동반한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부모님과 함께 산을 오르는 귀여운 꼬마들의 얼굴에는 함박 웃음꽃이 핀다.

 

점점 높이를 더하는 험준한 바윗길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올라선다. 문득 고개를 들어 위쪽을 올려다보니 비취색의 파란 하늘 아래쪽에 새하얀 구름송이가 둥실둥실 떠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올라서니 대원사 뒤뜰에 심어 놓은 새하얀 벚꽃송이가 착시 현상을 생기게 해준다. 나무의 크기가 우람한 것을 보니 수령이 수 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인다. 활짝 만개한 새하얀 벚꽃 숲길을 지나 올라서면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인 대원사(大院寺)이다. 대원사는 신라 문무왕10년(670년)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원사에는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를 주존(主尊) 불(佛)로 모셔 놓은 대웅전(大雄殿), 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 나한전(羅漢殿), 응향각(凝香閣), 삼성각(三聖閣), 봉익루, 범종각(梵鐘閣), 구요사, 객실 등의 건물이 있다. 사찰 주변에는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이 봄날의 한때를 즐기고 있다. 축제에 맞추어 아름다운 봄 풍경을 주제로 하여 백일장과 그림 그리기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활짝 만개한 새하얀 벚꽃송이가 장관을 이루고 푸른 송림 숲이 곱게 이어지는 산 능선은 시 한 수 절로 나오게 해준다. 귀여운 꼬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사리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다. 초롱초롱한 눈빛과 티 없이 맑은 얼굴은 깨끗한 자연미(自然美)를 닮았다.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진 돌담 모퉁이에는 노란색 수선화가 질박한 아름다움을 선물해준다. 마음 같아서는 절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하여 아름다운 풍경만 몇 장 카메라에 담고 자리를 떤다.

모악산 대원사.

 

산을 오를 때는 속세의 모든 번뇌와 미련 욕심을 버려야 비로소 산이 품어준다고 했던가! 올라서는 숲길과 돌계단 길은 발걸음을 옮길수록 힘이 든다. 산중턱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많다고 하나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다. 쉬어 갔으면 했는데 바로 앞에 수왕사 쉼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천천히 숨고르기를 하며 올라서니 산비탈 한쪽 모퉁이에 아담한 정자가 앉아 있다. 수왕사 절을 돌아보려면 동쪽으로 5분 정도 팔품을 팔아야 한다. 옆에 함께 계시던 분이 절에 가면 곡차를 나누어 준다고 재미있게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니 절 앞에서 산 꾼들을 상대로 막걸리와 함께 전통 차를 팔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 말사인 수왕사(水王寺)는 고구려 보장왕 때 백제로 망명한 보덕(普德)이 신라 문무왕20년(680년)에 수도 도량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웅전과 산신각, 진묵명당(震黙影堂), 요사채등의 건물이 있다. 깎아 지를듯한 암벽 아래쪽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수왕사는 해남 달마산 도솔암을 연상케 해준다. 절에서 나누어 준다는 곡차는 술? 아이러니 하게도 술이 아닌 바위틈에서 솟아나오는 시원한 석간수이다. 물 한 모금을 바가지로 떠서 마시니 첩첩이 가슴속에 쌓여 있던 모든 것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주변에 모든 등산로는 막아 놓았고 정상으로 올라서는 한 곳만 열어 놓았다. 이곳의 물이 아주 유명해 물위에 군림하는 왕이라 하여 절 이름도 수왕사로 부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언덕아래쪽에 외롭게 피어 있는 수선화가 상큼한 봄맛을 느끼게 해준다. 아래쪽으로 내려다보는 풍경 또한 쏠쏠하다. 달콤한 휴식을 마치고 오늘 마지막 언덕 오름을 올라서니 평평한 구릉지인 듯한 삼거리갈림길 안부이다. 삼거리갈림길에서 북쪽으로 내려서면 전북 완산구 중인동 종점이다. 남동쪽으로 내려서면 지나온 수왕사와 대원사로 내려서는 길이다. 남서쪽은 모악산 정상으로 올라서는 길이다.

북쪽으로 내려서는 산비탈에는 싱그러움을 더하여주는 푸른색 편백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산림욕을 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주 숲이 아름답다. 남쪽은 상학 능선으로 이어진다. 90% 이상의 사람들은 남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모악산 을 선호한다. 정상으로 가는 능선 길은 올라 설 때와는 정반대로 경사가 완만하고 호젓한 산책 길 같다.

 

이곳 역시 나무의 겨울눈이 이제 막 터지고 있다. 콩알처럼 부풀어 오른 겨울눈이 앙증맞다. 완만한 능선 길을 따라 올라서면 무제봉(해발685m) 정상이다. 산 꾼들이 쉬어 갈수 있게 나무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무우제(舞雨祭, 新雨祭)를 올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평범한 마을 행사였으나 백제시대 때는 모악산 주변 전체 주민들이 참여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 중엽에는 전주감영에서 감사가, 산 돼지를 제물로 올리고 각 고을에서는 준비한 제물과 아울러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제사를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주민들은 농악을 울리고 밤을 지새우며 한해 농사의 풍년을 소원하며 빌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한 거리에 방송 송신 중계 탑이 서있는 모악산 정상이 얼굴을 드러낸다. 다시 오름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에 올라서니 모악산 정상 주변은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다. 자기 자리를 남에게 넘겨 준 채 산중턱의 한쪽 모퉁이에 정상석이 애처롭게 앉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정상에 올랐다는 것을 기념으로 남기고자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여도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 했으나 지금은 허용하고 있다. 저 멀리 동쪽으로 구이저수지와 북쪽으로 전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쪽으로 눈길을 주면 기름진 김제평야와 금산사 절이 어렴풋이 조망된다. 뿌연 운무가 내려 앉아 시계가 좋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풍경을 즐길 수는 있다.

 

내려가는 길은 늘씬한 여인의 허리선처럼 한적하고 호젓한 오솔길이다. 약500m정도 북서쪽으로 내려서면 안부삼거리 갈림길이다. 안부삼거리 갈림길 능선에는 널찍한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서 휴식을 겸해 점심을 먹으려고 모여드니 널찍한 헬기장이 오히려 복잡하다. 심한 봄 가뭄으로 인하여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뿌연 먼지가 일어난다. 여기서 금산사 까지는 약3.3km미터 거리이다. 점심을 먹고도 충분히 여유 있게 하산을 할 수 있는 거리이다. 안부삼거리 갈림길에서 북서쪽으로 내려서면 염불암으로 내려서게 된다. 남동쪽으로 올라서면 지나온 모악산 정상이다. 남서쪽으로 내려서면 모악정과 금산사 계곡으로 내려서게 된다. 헬기장에서 회원님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휴식을 한 다음 북서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내려선다. 산 능선이 유순하고 경사가 완만하여 여유만만하게 내려선다. 호젓한 오솔길 같은 능선 길에 키가 나지막한 산죽 사이로 드문드문 붉은 속살을 드러낸 연분홍 진달래를 모처럼 만난다. 이제 막 꽃을 피운 진달래가 어린아이 볼처럼 여리고 부드럽다.

모악산 대원사.

 

키가 나지막한 산죽이 무리지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비좁은 산죽 밭 사이로 이어지고 있는 호젓한 오솔길을 지나 내려서면 해발735m미터 능선 삼거리 갈림길이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북서쪽으로 내려서면 염불암이다. 남동쪽은 지나온 헬기장과 모악산 정상으로 올라서게 된다. 오늘 산행 하산지점인 금산사는 서쪽으로 내려서야 한다. 능선 삼거리 갈림길에서 서쪽으로 호젓한 능선 길을 지나 내려서면 삼거리 갈림길이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올라서면 지나온 해발735m미터 능선 삼거리 갈림길이다. 서쪽으로 내려서면 심원암으로 내려서게 된다. 남서쪽으로 내려서면 늘안계곡으로 내려서게 된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서쪽으로 호젓한 능선 길을 이으며 약 20분 이상 내려서면 심원암 삼거리 갈림길이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남서쪽으로 내려서면 금산사로 내려서게 된다. 동쪽으로 올라서면 지나온 해발735m미터 능선 삼거리 갈림길이다. 남쪽으로 내려서면 심원암과 금산사계곡으로 내려서게 된다.

 

심원암 삼거리 갈림길 평평한 능선 위에 ‘북강’ 삼층석탑이 아담하게 서있다. 탑의 정식 이름은 김제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金堤 金山寺 深源庵 三層石塔)이다. 1963년 대한민국 보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검은색 이끼처럼 변해 버린 돌탑의 표면에서 세월의 흐름을 읽는다. 이 탑은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금산사 동쪽에 있는 심원암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북강 이란 북쪽 언덕을 뜻한다. 탑의 양식은 통일 신라 시대이나 각층지붕과 2층 이상의 몸체를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놓았다. 탑의 받침 부 위아래의 너비가 일정한 점으로 보아 고려 탑의 성격을 담고 있다. 층마다 지붕은 넓고 경사가 급해 전체적인 안정감이 덜하며 곳곳을 장식한 조각기법도 거칠다. 사람들의 손이 거의 닿지 않는 깊은 산속에 있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탑을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때에는 서민층과 사대부 집 부녀자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조그마한 요사 채를 세워 불편을 덜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그때 당시의 건물은 모두 허물어져 버렸다. 지금은 빈 공터와 돌로 쌓은 석축만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양지바른 산비탈에 현호색을 많이도 닮은 보라색 산 괴불주머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꽃송이가 앙증맞다. 또 다른 한쪽에는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 이야기를 품고 있는 꽃무릇도 보인다.

꿈길 같은 호젓한 오솔길을 지나 500m미터쯤 내려서면, 신라 36대 혜공왕 당시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를 중건하며 선객들의 도량으로 건립한 심원암(深源庵)이다. 심원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 산내암자이다. 화사한 벚꽃송이가 길손의 발목을 잡는다. 여인의 긴 머리 결처럼 땅을 향에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나뭇가지에 새하얀 벚꽃송이가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꽃비가 되어 내리고 있다. 법당 뜰 앞의 벚꽃 나무를 올려다보니 마치 하얀 눈꽃 송이가 가지마다 피어난 것처럼 멋진 운치를 보여준다. 스님은 출타를 하였는지 암자의 문은 굳게 잠겨 있다. 미끈한 삼나무 숲 사이로 비단길처럼 이어지는 호젓한 오솔길은 낭만과 사색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다.

 

심원암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면 모악산 정상에서 청수(淸水)가 흘러내려오는 금산사계곡 과 만나는 임도 삼거리 갈림길이다. 임도 삼거리 갈림길에서 북쪽으로 올라서면 지나온 심원암이다. 동쪽은 금산사계곡에 있는 모악정(母岳亭)으로 올라서는 계곡길이다. 서쪽은 금산사 부도(浮屠) 탑(塔)으로 내려서는 계곡길이다. 임도 삼거리 갈림길에서 금산사 동쪽 산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모악정(母岳亭)으로 올라서는 임도 길이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다. 임도 삼거리 갈림길에서 서쪽 모악산 금산사 부도 탑 쪽으로 내려서면, 산기슭에 야생으로 자라고 있는 파릇파릇한 연두색 잎이 싱그러운 녹차 밭이 산뜻한 봄맛을 느끼게 해준다. 산 능선에는 새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어디로 눈길을 주어도 수려하고 아름다운 풍광은 자연이 빚어 놓은 한 폭의 동양화처럼 보인다. 야생 녹차 밭에서 서쪽으로 내려서면 사랑나무 가 있다는 연리지가 임도에서 북쪽으로 200m미터 거리에 있다. 연리지인 사랑나무를 보려고 했지만 나무가 뽕나무라고 하여 올라가는 것을 그만둔다. 아직 뽕잎의 새순도 나오지 않아서다. 눈앞에 새하얀 아카시아 꽃송이를 방불케 하는 벚꽃송이가 절경을 펼치고 있다. 파릇파릇한 연두색 잎사귀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새하얀 벚꽃송이가 길손의 마음을 황홀함에 빠져들게 해준다. 연리지 나무로 올라서는 갈림길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내려서면 선홍색의 명자꽃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부도 탑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제 까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종류의 벚꽃을 보게 된다. 새하얀 벚꽃 꽃잎이 겹겹이 쌓여 있다. 봄 햇살이 새하얀 벚꽃송이 위에 부서져 내리니 더욱 운치가 있고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부도 탑이 있는 곳에서 위쪽을 올려다보면 그 아름다움에 눈을 의심하게 된다.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는 벚꽃나무의 꽃송이가 하얀색이 아닌 연분홍색이다. 눈이 부실만큼 새파란 하늘과 연두색 신록의 새순이 돋아나는 나무가 함께 어우러지며 진풍경을 빚어 놓았다. 우람한 몸집을 하고 있는 커다란 벚꽃나무를 멀리서 바라보니 연분홍색의 구름이 꽃송이가 되어 살포시 내려앉은 것만 같다. 수려한 봄 풍경에 흠뻑 취하며 그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 들게 해준다. 푸릇푸릇한 풀밭에 애기똥풀이 수줍은 듯이 얼굴을 살짝 내민다. 좁쌀처럼 새하얀 꽃송이가 오밀조밀 하게 모여 있는 조팝나무가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 보통 5월초에 꽃이 피는데 날씨가 따뜻하여서 그런가! 벌써 꽃이 피었다. 주로 야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인데 향이 좋아 요즘은 조경용 가로수로 도로변에 도 많이 심고 있다.

모악산 금산시.

 

금산사 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호젓한 오솔길을 지나 서쪽으로 내려서면 미륵불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모악산 금산사이다.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本寺)이다. 『금산사 사적(金山寺 事蹟)』에 의하면 백제 법왕1년(599년)에 나라의 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창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중창 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미륵(彌勒)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모악산 금산사는 고려 문종33년(1079년)혜덕왕사 소현 화상(和尙)이 대사구와 봉천원구, 광교원구 등 총 88당 711칸의 대가람으로 중창하였고, 산내 암자 수가 40여 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모든 법당과 암자가 전소 되고 말았다. 이후1601년(선조34년)수문대사가(守文大師)가 지훈, 덕행, 천성, 응원, 학련, 대전, 운근 등15명의 화상과 함께 재건을 시작하여 1635년(조선 인조13년)에 35년간에 걸쳐 해온 대장정을 마무리 했다. 이때 대적광전(大寂光殿), 미륵전(彌勒殿), 대장전(大藏殿) 등 대사구역을 모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법당과 건물은 35채 이다.

 

 

금산사는 신라 불교 오교구산(五敎九山)의 하나로 특히 미륵불을 모신 것으로 유명하고 미륵신앙의 성지로 여겨진다. 미륵신앙을 이용한 역사적인 인물로는 스스로를 생불(미륵)이라 칭했던 후 고구려의 궁예, 백제의 견훤, 근세의 증산 강일순 등이다. 특히 견훤은 아들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삼 개월 만에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고 자신이 건국했던 후백제를 멸망시키는데 기여했다.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14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오늘날까지 법등을 밝혀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금산사 일원은 사적 제496호 지정되어 있으며,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모악산 서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모악산 산줄기가 어머니 품처럼 아늑하게 감싸고 휘감아 돌아가는 널찍한, 산 아래쪽에 자리 잡은 금산사는 그 규모와 웅장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사찰 곳곳에 활짝 만개한 나이 많은 벚꽃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백목련과 붉은 선홍색의 명자 꽃,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수양 홍매화 등 아름다운 꽃이 지천이다. 많은 종류의 꽃과 나무들이 정원수(庭園樹)로 심어져 있다.

 

모악산 금산사의 가람배치는 크게 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제1구역인 대사구에는 기도와 법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본전(本殿)인 대적광전(大寂光殿), 미륵전(彌勒殿)등 많은 법당이 있다. 제2구역인 봉천원구에는 부도전이 있는 아래쪽에 큰스님들이 주석(主席)하던 곳으로서 또 하나의 금당(金堂)을 짓고 노사나불(盧舍那佛)을 모셨다. 제3구역인 공교원구는 일주문 근처구역으로 유식(唯識)에 관한 경전을 판각하여 인쇄하던 곳이다.

 

사찰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하는 모악산 금산사(母岳山 金山寺) 일주문(一柱門)은 제일 남쪽에 있다. 일주문에는 “모악산 금산사(母岳山 金山寺)”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은 건물의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어서 일주문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주문은 일심(一心)즉 한자그대로 하나의 마음을 뜻하고 있다. 일주문은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모든 번뇌로부터 부산히 흩어져 있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로 향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금산사 일주문은 1975년에 세운 건물로 목조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 북쪽으로 100m 정도 오르면 작은 개울 건너에 있는 금강문(金剛門)을 지나야 한다. 금강문은 대개 천왕문의 대문에 금강역사의 모습을 그려 놓거나, 때로는 천왕문 안에 조각상을 만들어 세워놓기도 한다. 금산사는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금강문을 천왕문 앞에 별도로 세워 놓았다.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대체로 불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다른 말로 인왕역사라고도 한다.

이 신은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온갖 비밀스러운 사적(事跡)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5백의 야차 신을 거느리고 현겁(現劫)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 금산사 금강문은 1994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며 안쪽에는 인왕상 2기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 동자를 모셔 놓았다.

 

금산사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금강문이 따로 있다. 현재 세워져 있는 금강문을 지나 바로 동쪽에 ‘모악산 금산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이다. 1994년 가람을 일신할 때 절의 입구를 변경하면서 본래의 금강문 서쪽 앞에다 새롭게 금강문을 세웠다. 기존의 금강문은 1556년 명조 11년에 인언(仁彦), 경휘(敬輝)스님이 재건한 뒤 416년이 지난 1972년에 중수 때까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유서 깊은 건물로 남아 있다.

 

금강문에서 북쪽방향 일직선상에 천왕문(天王門)이 있다. 불교에서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셔 놓은 전각(殿閣)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다. 동, 서, 남, 북 네 곳을 지키게 된다고 한다. 천왕문 안쪽에는 사방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봉안해 놓았다. 사천왕은 불법세계의 호법신으로 수미산을 중심에 둔 불국토의 사방을 지키는 하늘의 왕이다. 천왕문은 이런 사천왕을 모셔 높은 형태의 건물이다. 보통 사찰에서는 천왕문이 금강문의 역할을 겸하고 있어서 금강문이 없다. 그러나 금산사에서는 금강문과 천왕문을 모두 설치 해 놓았다. 그만큼 강력하게 불법을 수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담겨 있다.

모악산 심원암 3층 석탑.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약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사찰에서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반드시 사찰의 입구에 놓이게 되어 있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와 지주를 놓았던 기단석 등이 현재도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전북익산(全北益山)의 미륵사지(彌勒寺址)와 경북경주(慶北慶州) 보문사지(普門寺址)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모악산 금산사를 중창한 것이 766년 신라 혜공왕(惠恭王)2년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천왕문 정면 북쪽에 있는 누각 건물이 보제루(普濟樓)이다. 정면7칸, 측면3칸의 2층 누각식 건물이며 아래층은 가람의 중심 법당이 있는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역할을 하는 중문이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누각건물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잦은 외침에 따라 승병(僧兵)이 조식되고 사찰이 의승군(義僧軍)의 집결장소가 되면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누각이 번성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나라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사찰에서 승병이 사라지면서 누각건물은 법회와 강설, 그리고 대중 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은 이러한 실용적 기능보다는 사찰에 있는 가람의 한 구성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중기 만세루(萬歲樓)라는 12칸짜리 누각을 계승한 건물이 보제루(普濟樓)이다.

 

보제루 중문 계단을 넘어서면 모악산 금산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가람이 모두 모여 있는 대사구이다. 대사구에는 가장 북쪽에 삼성각 전각이 있다. 삼성각에서 가람의 제일 중앙 남쪽방향에 대적광전(大寂光殿)법당이 동서로 길게 자리 잡고 있다. 이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남동쪽과 남서쪽으로 많은 법당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다. 제일 먼저 대적광전 법당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금산사 대적광전은 대사구에 있는 미륵전의 서쪽 가람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단층 법당으로는 가장 웅장한 전각이다. 대적광전은 연화장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법당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전각(殿閣)을 본전(本殿)으로 건립하며, ‘화엄경(華嚴經)’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華嚴殿) 또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하여 비로전(毗盧殿)l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금산사에 현존하고 있는 대적광전 법당은 앞면7칸, 옆면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종전의 형태로 복원하여 놓았다. 원래 법당이름은 대웅광명전(大雄光明殿)혹은 대법당이라고 불렀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창건하면서 지금의 미륵전을 금당(金堂)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아마도 대적광전이 있던 이곳에 법당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壬辰倭亂)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절 이 모두 전소된 후 1635년 수문대의 중창에 의해서였다. 이후 조선 영조52년(1776년)에 금파대사의 법손인 두월장로가 중수하였고, 1926년과 1938년 미륵전 보수 시에 다시 수리되었다. 수문대사가 중창할 때 따로따로 모셨던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노사나불(盧舍那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해 창건 하였던 것이다. 법당의 외부 형태가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주는 것은 한국 전통건축의 기능적 예술적 지혜의 덕택이라 할 수 있다. 모악산 금산사가 미륵전을 토대로 미륵신앙을 표방하였지만 한국불교의 이러한 통불(通佛) 교적(敎籍)경향은 고려시대 이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대표적 부처와 보살을 모두 수용한 대 전각을 건립하게 되었다. 대적광전 법당 내부의 불단에는 제일 좌측으로부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하여, 우측으로 노사나불과 약사불등 5여래(如來)와 그 협시(夾侍)로서 6보살을 봉안해 놓았다. 봉안해 놓은 6보살은 제일좌측에서부터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관음보살(觀音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일광보살(日光菩薩)등이다. 이 밖에 500나한을 함께 봉안 해 놓았다.

금산사 명자꽃3.

 

대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여 연화장(蓮華藏) 세계(世界)를 상징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삼신불은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또는 응신불(應身佛)이다. 모악산 대적광전에는 특이하게 삼신불이 아닌 5여래 6보살이 모셔져 있다. 이는 한국불교의 특징인 통불교(通佛敎)적인 성격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었고,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일찍부터 채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국에 있는 명산대찰 어느 곳을 가보더라도 쉽게 알 수가 있다. 건축과 조각은 석굴암에 비견되는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유적중의 하나이다. 석굴암이 8세기 통일신라 신앙의 결정체라면 금산사 대적광전은 신라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한국 불교의 총채라 할 수 있다. 대적광전 법당 왼쪽 벽에는 1991년 당시 주지 월주 스님과 증명(證明) 월산 스님이 조성한 신중탱화를 봉안하여 놓았다. 모악산 금산사 대적광전은 보물 제47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적광전 뒤편 서쪽에는 조사전(祖師殿)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있다. 먼저 서쪽에 있는 조사전은 그 종파의 조사스님, 사찰의 창건주, 역대주지스님 등 해당 사찰과 관련하여, 후세에 존경을 받는 스님들의 영정(影幀)이나 위패(位牌)를 모셔놓은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조당(祖堂)또는 조사당(祖師堂)이라고도 한다. 조사전이 없는 절에서는 영각(影閣)을 짓고, 국사를 배출한 절에서는 조사전 대신 국사전(國師殿)을 짓기도 한다. 조사전이나 국사전은 사찰에서 가장 깊숙한 장소에 세워져 있다.

 

동쪽에 있는 나한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를 모셔 놓은 전각이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서 의역하여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 한다. 응공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고,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능력의 소지자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나한전(羅漢殿)에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주불(主佛)로 하여 좌우에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봉안되어 있고 주위에, 보통5백인의 나한을 모셔 놓았다. 응진전(應眞殿)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좌우에 석가모니부처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모시고 있다. 그리고 주위에16나상을 양끝에는 범천과 제석천을 함께 봉안하여 놓았다. 또한 삼세불(三世佛)을 모시는 경우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을 봉안하기도 한다.

 

원래 금사사의 나한전은 방등계단과 오층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하였기 때문에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불렀다. 나한전 법당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여 놓았다. 또한 석가여래의 여러 제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을 모셔 놓았고, 16나한상과 2인의 시자상도 목조로 조성하여 놓았다. 그리고 전각 이름에 걸맞게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계단식의 불단을 마련하여 가득하게 봉안하여 놓았다.

 

조사전과 나한전 전각 뒤편 북쪽에는 삼성각(삼성각)건물이 있다. 대부분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산신각(山神閣) 혹은 삼성각(三聖閣)은 풍수 지리적으로 핵심인 결혈처(結穴處)에 자리하고 있다. 보통 산신각에는 산신(山神)을 봉안하고 있지만 삼성각에는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등 삼신(三神)을 함께 봉안(奉安)하고 있는 전각이다. 산신은 재물, 칠성은 수명, 독성은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대적광전 동쪽에는 방등계단과 적멸보궁 전각이 나란히 있다.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를 금산사에서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라 부르고 있다. 이 방등계단 중앙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범종모양의 화강암으로 제작된 방등계단사리탑(方等戒壇舍利塔)이 있다. 방형(方形)의 상하(上下)이중기단(二重基壇)을 구비(具備)한 높이2.75m미터의 석종형(石鐘形)의 부처님 진신(眞身) 사리탑(舍利塔)이다. 기단(基壇)은 대석(臺石) 면석(面石) 간석(竿石)으로 되어 있고, 상하 기단 면석에는 불상(佛像)과 신장상(神將像)이 조각(彫刻)되어 있다.

하층기단(下層基壇)이면(裏面)에는 난간(欄干)을 돌렸던 흔적(痕迹)이 있다. 또한 석주(石柱)에는 기이(奇異)한 인물상(人物像)이 새겨져 있다. 석난간(石欄干) 귀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는 판석(板石)네 귀에는 사자(獅子) 머리만을 부각(浮刻)시켜 조상(造像)해 놓았다.

 

탑신의 받침 부분 주위(周圍)에는 연판(蓮板)을 돌리고 있고 밑바닥의 평면(平面)은 범종(梵鐘) 모양으로 되어 있다. 특히 밑 부분에는 범종의 하대(下臺)모양(模樣)과 같이 화문대(花紋臺)를 조각하여 놓았다. 정상(頂上)에는 구용(九龍)이 전각(篆刻)되어 있으며 그 위로 보주석(寶珠石)을 올려놓고 있다. 이와 같은 석종형의 사리탑은 통일신라(統一新羅)말(末)부터 나타나기 시작(始作)하는데 인도(印度)의 불탑(佛塔) 형식(形式)에서 연유(緣由)된 것이다. 방등계단사리탑은 보물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모악산 산벚꽃.

 

방등계단은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인 태사, 태부, 태보 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이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이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 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 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한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다.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 위에 있는 석종형 부처님 진신 사리탑 앞쪽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五層石塔)이 자리하고 있다. 사찰에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舍利)나 경전(經典)을 봉안(奉安)하여, 법당(法堂)앞 중앙(中央)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이다. 모악산 금산사 오층석탑은 방등계단(方等戒壇)을 장엄(莊嚴)는 정중탑(庭中塔)으로 고려시대(高麗時大)에 세워진 탑이다. 정사각형의 판재를 이용한 이중기단(李重基壇) 위에 높이 7.2m미터의 5층 석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탑이 있음으로 해서 방등계단을 더욱 성(聖) 서럽고 장엄(莊嚴)하게 해준다. 탑의 구조(構造)는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형인 소박하고 단순함을 따르고 있으나, 하층기단이 협소(狹小)하고 옥개석(屋蓋石) 추녀 끝이 살짝 들려 고려(高麗)의 시대적(時代的) 특징(特徵)을 보여준다. 탑의 상륜부(相輪部)의 노반(露盤)이 크고 넓으며 그 위에 특이한 복발(覆鉢)이 있다. 복발 위에 보륜(寶輪)과 보주(寶珠)가 설치(設置)되어 있다.

 

기록에는 9층이라 하였으나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해지고 있는 전설에 의하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세웠다고 하지만 이는 잘 못 전해진 것이다.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 금산사 오층석탑 중창기”가 발견되었다. 중창기 기록에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 경종4년 979년에 시작하여981년에 완공되었다는 사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과거 부처님인 정광여래사리(定光如來舍利) 2 과(顆)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5 과(顆)가 나와, 탑을 복원과 동시에 다시 봉안 하였다. 이 밖에 금동관음상(金銅觀音像)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小佛像)이 발견되었다.

 

5층 석탑이 세워져 있는 맞은편 동쪽에 적멸보궁(寂滅保躬)이 있다. 금산사 적별보궁은 옛 나한전이 있던 자리에 예배각(禮拜閣)으로 유리벽을 통하여 방등계단에 있는 부처님 사리탑에 경배를 하며 예불을 드리는 법당이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사찰의 당우(堂宇)가운데 하나. 석가모니가 화엄경(華嚴經)을 설(說)한 중인도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하는 전각으로,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법신불(法身佛)로서의 석가모니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불전(佛殿)에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하는데 금산사가 여기에 해당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적멸보궁은 1. 경남남도 양산시 영취산의 통도사(通度寺). 2.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의 중대(中臺). 3.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의 봉정암(峯頂庵). 4. 강원도 영월군 사자산의 법흥사(法興寺). 5.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의 정암사(淨巖寺)이다. 금산사의 적멸보궁은 한국의 5대 적멸보궁에 해당되지 않지만 경남 양산 통도사의 대웅전과 같은 경우라고 보아야 한다.

모악산 심원암.

 

적멸보궁 정면 맞은편 동편에는 송대향각이 있다. 송대(松臺) 지역의 노전 또는 지전(持殿)으로서 이곳의 불사를 관리하던 스님들이 머물던 요사채 건물이다. 미륵전이 있는 동북쪽 언덕 위에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있는 건물이다. 방등계단과 5층 석탑이 있는 일단의 언덕에 나란히 배치되어 별원과 같이 꾸며져 있다. 현 건물은 1914년에 건립되었으며 금산사의 큰 스님이 기거하는 곳이다. 조선 말기에 건축된 다른 요사 건물과 같이 간결하고 정초한 자태에다 고요하고 울울한 수림 속에 한적하게 자리하고 있어, 오랜 세월 고승들의 숨결이 깊숙이 배인 산사의 작은 승방 같다.

 

금산사의 중문(中門)인 보제루(普濟樓)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동쪽으로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이 자리하고 있다. 금산사의 주전각인 미륵전(彌勒殿)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이것은 곧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년)부터 혜공왕 2년(766년)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운 법당이다. 미륵전 법당 안에는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여 놓았다. 그러나 이 법당은 정유재란 때 왜병으로 인한 화재로 인하여 전체가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법당은 조선 인조13년(1635년)에 수문대사가 한국 유일의 삼층(三層) 법당(法堂)을 재건하였다. 법당 외부1층과 2층은 정면5칸, 측면4칸이고 3층은 정면3칸 측면 2칸인 팔작(八作)지붕 다포형식(多包形式)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당 내부에는 층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통층(通層)이다. 건물 중앙(中央)의 제일 높은 기둥은 하나가 아니라 몇 개의 기둥을 연결 하여 만든 것이다. 이러한 기둥양식은 목조탑(木造塔) 양식(樣式)에서 번안(飜案)된 구조(構造)이다. 미륵전은 용화전(龍華殿), 산호전(山呼殿), 장륙전(丈六殿) 등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현재도 특이하게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彌勒殿)등 각기 다른 이름으로 된 편액이 걸려 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하여 주고 있다. 법당 오른쪽 벽에는 1890년(고종27년)에 조성한 제석천룡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준(聳俊), 정선(定善), 오종(午從)등의 금어(金魚)가 그렸는데,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법당에 모셔 놓은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미터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夾侍)는 8.79m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 한분만 모셔 놓았다. 그 뒤 조선시대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 했는데, 1934년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이후 4년 만인 1938년 우리나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 1901~1940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을 하고 있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이다. 양손을 들고 법당마루의 중생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미륵불은 종교와 관계없이 무언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양쪽 옆으로 황금 관을 머리에 쓰고 서있는 협시보살도 인상적이다. 대개 미륵불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脇侍菩薩)은 왼쪽이 법화림(法花林)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大妙相)보살 등 삼존상(三尊像)이 조상(彫像)되어 있다. 협시보살 좌우에는 언제 봉안하였는지 모르는 또 다른 것이 2구가 있다. 본존의 협시보다 약간 적지만 역시 금을 입힌 소조상이다. 법당 내부 지하에는 연대미상(年代未詳)의 철제(鐵製) 연화대(蓮花臺)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 법당 내부에는 원래 철불이 모셔져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항간에는 이 연화대가 솥으로 알려져 있으며, 솥을 만지는 사람은 속세(俗世)의 업장(業障)을 소멸(燒滅)하고 소원 성취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미륵전의 터는 원래 용이 살고 있던 연못이었으나 어떤 고승의 가르침에 따라 참숯으로 연못을 메워 용을 쫓고 미륵전을 건립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금산사 미륵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3층 건물이며 내부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는 통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에 하나 밖에 없는 3층 목조건물이며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보제루 옆 동쪽에 원통전(圓通殿)이 있다. 관음전(觀音殿)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주불(主佛)을 봉안해 놓은 법당이다. 다르게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관음보살은 왼손에는 연꽃봉오리를, 오른손에는 감로병을 들고 연좌에 앉아 있다.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을 의미하며, 감로병은 불사를 뜻하고 있다. 양류관음(楊柳觀音)의 경우에는 버들가지를 들고 있기도 하며, 십일 관음처럼 11개의 얼굴을 가진 보관을 쓴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밖에 해수관음, 용두관음, 백의관음, 천수관음으로도 표현된다. 후불탱화는 이러한 관음보살의 유형에 따라 다르게 봉안된다. 관음보살을 협시는 것은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지만 조각으로 표현된 것은 거의 없고 대개 후불탱화에 그려진다.

얼레지.

 

모악산 금산사 중문인 보제루에서 가람 중심 서쪽에는 범종각(梵鐘閣)이 있다. 범종각을 다른 이름으로 범종루(梵鐘樓)라고도 부른다. 범종각은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볼 때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렇게 범종각이 오른 쪽에 위하는 연유는 불교의 체용설(體用說)에 입각하여 볼 때 오른쪽은 체(體), 왼쪽은 용(用)해당하는데, 이는 소리는 용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찰의 범종각에서 은은하게 울려나온 소리는 곧 우리들의 일심의 작용이요, 부처님의 위대한 작용을 상징하고 있다. 범종에서 은은하게 울려나오는 소리는 스스로를 밝히고 중생을 교화하는 크나큰 울림인 것이다. 범종각에는 불전 사물인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을 함께 비치하고 있다. 불교의식은 중생들을 착한 길로 인도 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승화시켜 주는데, 이런 의식에는 장엄한 절차가 따르게 되며 뭇 중생들의 심금을 울리는 신묘한 운율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할 수 있다. 범종소리는 명부세계의 중생을, 법고 북소리는 모든 축생들을, 목어소리는 물속 생물을, 운판소리는 날짐승을 제도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미터 떨어진 거리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석련대는 연화대 형식으로 조각한 불상의 대좌(臺座)이며 정확한 이름은 석조 연화대이다. 높이가 1.67m, 둘레가10.3m미터가 넘는 거대한 연화대이다. 연화대(蓮花臺) 전체가 1개의 돌로 되어 있으나 여러 개의 돌로 만들어진 것처럼 상, 중, 하 대(臺)의 삼단(三壇) 양식(樣式)을 정연(整然)히 갖추고 있다. 하대석(下臺石)의 측면(側面)은 10각형(角形)이며 8개의 면에는 안상(眼象)을 음각(陰刻)하고 그 안쪽에 서화(瑞花)를 조각(彫刻)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 복련판(伏蓮板)을 각(各) 변(變)에 따라 10판(板)을 돌려 웅려(雄麗)하게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조각과 장식(粧飾)이 외에도 중대(中臺), 상대(上臺) 등에는 안상과 화문(花紋), 연판문(蓮板紋) 등(等)을 장식적(粧飾的) 의장법(儀粧法)으로 조각하였다. 상대석(上臺石) 윗면 중앙부분(中央部分)에는 두 개의 방형(方形) 구멍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이 좌대(座臺)가 석불입상(石佛立像)을 세우는데 이용(利用)하지 않았을까 추정(推定)하고 있다. 좌대의 조각 수법(手法)이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양식(樣式)과 유사(類似)하나 무질서(無秩序)한 안상의 배치(配置)와 연판내(蓮板內) 사치(奢侈)서러운 조각 및 장식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高麗時代)초기(初期) 대략(大略) 10세기경(十世紀境)의 석조물(石造物)로 주청하고 있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 재질은 하나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화대좌 각 면에 조각한 기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석련대가 있는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성이 높아 보인다. 아마도 고려시대 이후 사찰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석련대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적광전 동쪽 앞마당에는 고려시대 혜덕왕사가 금산사를 중창 할 때 세운 보물 제27호인 육각다층석탑(六角多層石塔)이 있다. 이탑은 고려초(高麗初)의 석탑으로 봉천원(奉天院)이 있던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앞마당 에서 옮겨온 것이다. 현재(現在) 석탑의 높이는 2.18m이며 11층(層)탑으로 우리나라의 석탑이 대부분 화강암(花崗巖)으로 만든 방형탑(方形塔)인데 비(比)에, 이 석탑은 점판암(粘板岩)의 육각다층석탑(六角多層石塔)임이 특색(特色)이다. 봉천원구는 고려 문종33년(1079년) 혜덕왕사가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예상된다. 이후 조선시대로 내려오며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현재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육각다층석탑을 옮겨 놓았다. 이색적(異色的)인 각층(各層)의 체감비례(體感比例)가 아름다우며 섬세(纖細)한 조각(彫刻) 기법(技法)을 보여준다. 원래(元來) 이 석탑에는 층마다 탑신(塔身)이 있었으며, 육각의 모서리마다 풍경(風磬)이 달려 장엄(莊嚴)서러웠다. 육각다층석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공예 탑으로 옮겨가는 초기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고려시대의 공예 탑이 지니고 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가장위의 2개 층(個層)의 탑신과11개 층의 옥개석(屋蓋石)만 남아 있다.

애기똥풀.

 

대적광전(大寂光殿) 동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는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이다.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相輪部)를 구성하는 부재(部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까지도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찰의 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彌勒殿)앞에서 미륵불(彌勒佛)에게 광명을 공양(供養)하던 석등(石燈)이었다고 한다. 이 기록이 맞는다면 현재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조성(造成) 기법(技法)을 간직한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 되었다. 노주는 원래 미륵전 정중에 있었던 것인데 1922년 대장전 이 전시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

 

미륵전에서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殿)

이 자리하고 있다. 대장전은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사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웠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 대기에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石造) 보주(寶珠)를 올렸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 인조 13년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현재와 같은 전각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미륵전 앞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 된 것은 1922년에 옮겨졌다. 시대가 바뀌면서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 있는 복발(覆鉢)과 보주(寶珠)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시대 때의 목탑양식을 엿 볼 수 있게 해준다.

 

모악산 금산사에는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대웅전(大雄殿)이 없다. 대웅전이 없는 금산사에는 미륵전이 있다. 일반사찰의 대웅전과 같은 미륵전에는 미륵이 주불(主佛)로 모셔져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대장전에 따로 모셔져 있다. 대장전 법당에는 주불인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 보살을 협시로 두었다.

일반사찰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셔 놓은 대웅전(大雄殿) 법당 내부에 불상을 모셔놓은 뒤쪽에 후불탱화(後佛幁畵)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소와 동자가 나오는 심우도(尋牛圖)혹은 부처님의 성도과정을 그린 팔상도(八相圖)를 걸어둔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하시는 정경을 묘사한 탱화이다. 심우도는 평범한 중생이 불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10장으로 나누어 그린 탱화이다. 탱화 속에 중생은 동자의 형상으로 불성은 소의형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대장전(大藏殿)내부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여 놓았는데, 흔히 대웅전에서 볼 수 있는 심우도나 팔상도, 영산회상도인 후불탱화는 걸려있지 않다. 대신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 그러져 있다. 대장전 외벽좌우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대장전 법당 앞쪽에는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 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花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火窓)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문화재이다.

 

대적광전에서 서쪽으로 대장전과 나란히 명부전(冥府殿)이 있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사찰 속으로 옮겨 놓은 전각이다. 명부전 전각 안에 지장보살을 봉안 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 혹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의 심판관인(審判官人)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명부전 법당안쪽에는 지장삼존인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하여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봉안해 놓았다. 중심인 지장보살은 왼손에 금강보륜(金剛寶輪)을 쥐고 있다. 지장삼존의 좌우에는 시왕상 10구와 판관, 녹사, 인왕상, 동자상 각 2체가 명부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명부전 내부 정면 출입문 위쪽에는 ‘금산사 시왕전중수기’를 비롯한 현판 9개가 나란히 걸려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주위에 있는 사찰을 방문하거나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부분 규모가 크고 면적이 넓은 사찰에는 많은 법당과 건물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찰을 돌아보면서 현판에 적혀 있는 법당 이름에 대하여 궁금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법당에는 대웅전처럼 이름제일 끝에 전(殿), 누(樓), 각(閣), 당(堂)등 각각 다른 글자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나 동네에서도 건물이름 제일 끝에 누(樓), 각(閣), 당(堂),재(齎), 합(閤), 헌(軒), 정(亭)자가 붙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대원사 수선화.

 

법당이나 건물 명칭에서 이름제일 끝에 전(殿)자가 붙으면 여러 건물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건물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서 옛날 임금이나 왕이 거처하던 궁궐 이름에는 전(殿)자가 붙게 되지요. 일반 사찰에서는 불상을 모신 법당에서만 전(殿)자를 붙이게 됩니다. 전(殿)자 보다 한 단계 낮은 것이 당(堂)입니다. 예를 들어서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양진당(養眞堂)처럼 대갓집 택호나 궁궐에서 왕자의 거처나 관원들의 공적 공간에 당(堂)자를 붙입니다.

사찰에서는 조사당(祖師堂)처럼 스님들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에 당(堂)자가 붙여집니다. 이 밖에 합(閤)자나 각(閣)은 전(殿)이나 당(堂)의 부속건물에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재(齎)자는 휴식공간이나 주거공간에, 헌(軒)자는 대청마루가 붙어 있는 휴식공간에 쓰입니다. 누(樓)자는 2층 건물로 휴식이나 유희를 목적으로 하는 건물에 붙여서 쓰게 됩니다. 정(亭)자는 누(樓)와 같은 목적이나 1층 건물 이름제일 끝에 붙여서 쓰게 됩니다.

 

사찰에 서 볼 수 있는 법당의 현판 이름은 그 법당에 모셔놓은 주불(主佛)에 따라서 현판의 이름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중앙에 본존불(本尊佛)로 모셔져 있고, 좌측에 문수보살(文殊菩薩) 우측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협시로 모셔 놓았습니다. 불상뒤편에는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정경을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인 탱화(幁畵)를 걸어두었습니다. 또한 법당 벽이나 대웅전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보통 소와 동자가 나오는 심우도(尋牛圖)나 부처의 성도 과정을 그린 팔상도(八相圖)그림입니다. 심우도는 평범한 중생이 불성을 찾아가는 대정을 10장의 그림으로 나누어 그려놓았습니다. 그림에 속에 나오는 중생은 동자의 형상을 하고 있고 불성은 소의 형상입니다. 이 밖에 팔상전(八相殿), 영산전(靈山殿) 법당에는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는 부처의 탄생(誕生)부터 열반(涅槃)까지를 8장의 그림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지요. 대웅전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사마(四魔)즉 불도를 닦는데 방해가 되는 네 가지의 마를 막아내는 힘이 있다는 것에서 유래하여 대웅전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주불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앙에 봉안하고 좌측에 아미타불(阿彌陀佛), 우측에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이렇게 삼존불을 모셔놓은 법당입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西方征討 極樂世界)를 다스리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셔 놓은 법당을 미타전(彌陀殿), 아미타전(阿彌陀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수각(無量壽閣), 극락전(極樂殿),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고 합니다. 법당에는 주불인 아미타불을 중앙에 두고 우측에 관음보살(觀音菩薩)좌측에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함께 삼존불을 봉안해 놓았습니다. 대세지보살을 대신하여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되신 하기도 합니다.

 

그럼 모악산이 품고 있는 오묘한 신비와 진수를 맛보려면 어디를 찾아야 할까! 금산사, 대원, 수왕, 심원사 주위에 만개한 나이 많은 벚꽃과 천연고찰이 품고 있는 멋과 아름다움에서 나는 찾았다. 또한 벚꽃과 야생화, 붉은 선홍색의 꽃송이에서 자연의 미를 보았다. 흔히들 봄을 여성 가을을 남성에 비유한다. 아니러니 하게도 나는 두 계절을 모두 좋아한다. 그 나름대로 모두 장단점이 있지만 단점은 빼고 장점만 생각하자. 인생을 살다 보면 문득 불쑥불쑥 떠오르는 그리움이 있다고 하였던가! 내 마음속의 그리움을 찾아서 떠난 산행 길. 예쁜 몸단장을 끝마친 봄 처녀처럼 살며시 품속에 와 안기는 대자연(自然)이다. 언제나 대자연은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하고 아늑함을 선물로 준다. ※본문에 있는 모악산 금산사에 대한 내용은 금산사를 탐방하면서 사찰 내에 있는 안내간판의 내용과, 모악산 금산사 홈페이지에서 일부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 벚꽃.
민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