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수업이 막 끝나갈 무렵 휴대폰 벨이 울린다. 산악회를 운영하고 계시는 회장님 전화다. 오늘 오후에 시간이 나면 공주 영평사로 답사나 다녀 오자고 하신다. 가을이라 그런가. 통통 튀는 탁구공처럼 툭 건드리면 어디로 튈지 모를 내 마음. 구절초 이야기에 벌써 마음이 설렌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향하는 노선버스에 승차한다. 오늘 따라 달리는 버스가 왜 이리도 늦은지 약속된 시간은 다가오고 구절초를 보러 간다는 생각에 마음은 더욱 조급해진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회장님께 실례가 되지나 않을까. 버스에서 내려 종종 걸음으로 집으로 달려간다. 집에 도착하여 카메라만 챙겨서 집을 나선다. 약속시간 보다 휠씬 늦은 시간에 산악회 사무실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회장님과 함께 차를 타고 대구를 출발한다. 산의 단풍은 북쪽에 있는 설악산에서 남으로 남하 하며 험준한 소백산을 넘어 지리산으로 내려온다고 했던가! 벌써 나뭇잎들이 붉게 물들고 있다. 반대로 들녘의 단풍과 봄은 남쪽에서 북으로 올라 간다. 누렇게 잘 익은 벼들이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들녘이 진풍경을 선물한다. 대구를 출발하여 숨가쁘게 경부고속도로를 달려온 회장님의 애마는 대전 월드컵 경기장 근처에서 일반국도로 방향을 잡는다. 그 날의 뜨거운 함성과 열정은 오 간데없고 지금은 썰렁한 건물만 남아 있다. 대전에서 국도를 달려 충남공주로 들어선다. 눈앞에 높은 성벽처럼 보이는 계룡산 산 능선이 그림 같은 선경을 보여주고, 싱그럽게 익어가는 가을 햇살아래에 무리를 지어서 서있는 푸른 송림 숲이 운치를 더하여준다. 짧은 가을 해가 서산너머에 걸릴 때 구절초향 그윽한 영평사에 도착한다. 불멸의 행복 영평사는 역사와 문화의 도시 공주시 장기면 산학리 장군산 해 뜨는 마을 동쪽 양지바른 곳에 아담하게 들어 앉았다. 영평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마곡사, 갑사, 동학사 등의 고찰들과 연계하여 명찰순례 불자들이 많이 찾는 사찰 중 하나이다. 경내에는 문화재 급 전통건물과 토굴이 있다. 아직도 반딧불과 가재 다슬기가 사는 청정한 물과 맑고 깨끗한 공기를 간직한 조용하고 아늑하며 청정한 수행도량이다. 타고 온 차를 주차장에 정차하고 조용한 산사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카메라렌즈를 구절초 꽃송이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산중턱 제일 높은 곳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삼성각부터 찾는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영평사는 사찰이 아닌 천연 고택을 보고 있는 듯 하다. 따갑게 내리쬐던 가을 햇살이 온순한 양처럼 순해질 무렵이라 그런가! 이른 봄 새싹이 돋아난 것처럼 파릇파릇한 풀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하얀 꽃송이들이 눈인사를 건 내고 뜰 앞에 정원수처럼 보이는 나지막한 소나무가 장관이다. 이렇게 해가 질 무렵인 오후에 사진을 찍어야 선명하고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있다고 함께 동행 하신 회장님께서 말씀하신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스님의 독경소리가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심금을 울린다. 임도 길을 따라 뒤쪽으로 올라서니 고풍스러운 멋을 지닌 석등이 아담하게 서 있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무더운 여름 내내 싱싱함을 뽐내며 아름다운 꽃을 피어내던 백련은 자취를 감추었고, 파란 잎사귀 만이 가득히 덮여 있는 물위에 겨우 몇 송이만 남아 있는 붉은 연꽃을 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한쪽 모퉁이에 외롭게 서있는 코스모스 꽃이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푸른 참나무 숲 길을 따라 좀더 올라서니 삼만여 평의 산비탈에 하얀 눈꽃송이가 살포시 내려앉은 듯이 구절초들이 아름답게 수를 놓았다. 파릇한 잎사귀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민 구절초들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곳곳에 꽃동산을 만들어 놓았다. 바람조차 불어오지 않는 고요한 산사에 연분홍과 하얀 꽃송이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속삭이면서 밀월을 즐기는 듯 하다. 다소곳이 서있는 꽃송이 하나하나에서 이른봄부터 정성스럽게 가꾸어 오신 주지스님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늦은 가을 차가운 서리가 내리면 더욱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구절초는 기름진 땅이 아닌 척박한 환경에서도 뿌리를 내리며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간다. 평소에는 그냥 평범하게 보이던 야생화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어 주면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 화답한다. 구절초들이 뿜어내는 향긋한 향이 솔솔 피어오른다. 대웅전 앞에는 초록색의 넓은 잔디밭이 융단처럼 깔려있다. 그 옆에는 큰 키에 풍만한 얼굴을 하고 두툼한 턱에 온아한 미소를 뛴 대아미타불은 보는이로하여금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평소에 지은 죄도 없건만 부처님 앞에만 서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마조마 하며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다. 맑은 계곡 물이 흘러가는 양지바른 언덕 위에 가지런히 줄을 선 많은 장독들이 놓여있다. 물론 절에서 부처님께 올릴 공양인 된장과 간장을 담아 놓은 것이겠지만 구절초 잎과 줄기 꽃을 채취하여 차를 담아 놓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을 보니 유년시절 고향의 향수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파란 가을 하늘은 청명하고 높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주홍색의 감이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여름내 싱싱함을 자랑하던 파릇한 나뭇잎이 갈색으로 곱게 물드는 계절이다. 가녀린 꽃잎이 청초한 모습으로 피어나 가을 정취에 한몫을 보태는 꽃이 구절초이다. 계절이 바뀔 때 마다 많은 야생화들이 꽃을 피어낸다. 갖가지의 꽃들은 저마다 독특한 향과 멋을 간직하고 있듯이 구절초 또한 그러하다. 수수하고 소박한 꽃밭에 앉아 주마등처럼 지나간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처음 입사 할 때만 하여도 평생직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대한민국을 부도위기 직전까지 빠뜨린 외환위기는 모든 것을 변하게 했다. 이제 까지 듣지 못했던 구조 조정이니 명예퇴직이란 생소한 단어가 신문과 방송의 메인 뉴스에 자주 보도되었다. 처음에는 남의 일처럼 생각되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나를 향해서 화살을 겨누고 있는 듯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예상했던 일은 빨리도 찾아 왔다. 15년 넘게 나의 몸과 마음을 쏟아 부으며 정열을 불태웠던 정든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퇴사 했다. 이름하여 명예퇴직이다. 퇴사 할 당시만 하여도 또 다른 내일을 꿈꾸며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환경은 나의 생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구인광고를 보고 여러 곳에 이력서를 접수 하고 면접을 보았지만 나이 40대 초반인 사람을 고용하겠다는 기업은 많지 않았다. 냉혹한 현실 앞에 무기력하기만 한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했다. 가슴을 파고 드는 좌절과 분노를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단순 기술직에서 장기간 근속을 하다 보니 당연히 취업의 문은 좁았다. 늦었지만 전문 적인 기술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보고자 노동부에서 실시하는 실업자 무료 교육 과정에 입학원서를 접수시켰다. 그리고 대구에 소재하고 있는 한국 폴리텍6대학에서 하루 4시간씩 기술 교육과 훈련을 병행하고 있다. 교육을 받으면서 잠시 짬이나 멍들고 치쳐버린 나의 몸과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서 이렇게 구절초를 찾아서 왔다. 이 척박한 땅에서 대자연의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고 어김없이 꽃을 피우는 구절초처럼 내가 살아가야 할 미래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다른 사람들과 때때로 서로 몸으로 부딪치며 이 험한 세상을 함께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보다 더 힘들고 고단한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눈에는 아직도 나이 사십이 넘은 아들이 어린아이처럼 보이나 보다. 오늘도 달랑 카메라를 메고 집을 나서는 아들을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또 산에 가느냐고 물으신다? 주말마다 산에 쫓아다니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평일 날까지 집을 나서는 그런 아들이 안쓰러운가 보다. 구절초의 꽃말은 어머니사랑이다. 눈앞에 별처럼 총총한 구절초 꽃송이에서 어머니의 따듯한 숨결이 느껴진다. 하얀 구절초 꽃송이들이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영평사에 서서히 어두운 땅거미가 살며시 내려앉을 무렵 대구로 출발 한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선홍색으로 곱게 물들인 저녁노을을 바라며 나의 황혼도 저렇게 아름답게 꽃피우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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