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산행 기행문

전북 장성 백암산, 백양사.

풀꽃사랑s 2016. 10. 4. 22:27


같은 내장산 국립공원 내(內)에 있으면서도 산세와 풍경이 판이하게 다른 산이 있다.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이웃에 있는 ‘단풍’ 산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정읍 내장산과 견주어도 서로 우열을 가리기 초자 힘든 장성 백암산이다.
두 곳의 산이 모두가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단풍 못지않게 매서운 추위가 휘몰아치는 겨울이면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남하는 기압골이 동서로 길게 누워있는
백두대간 마루 금을 넘으면서 많은 눈을 내리게 한다.
많은 적설량을 이루며 내리는 눈이 피어내는 설경 또한 장관을 연출하는 산이다.
이번 탐방 길은 매번 내장산 신선봉에 올라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내려와야 했던
장성 백암산과 백양사 절을 찾아서 길을 나선다.

백암산 탐방은 전남대학교 수련원이 있는 남창골에서 동쪽으로 올라서며 시작한다.
전날 내린 새하얀 눈이 아직 녹지 않고
수북하게 쌓여 있는 오솔길로 올라서니 하늘을 가릴 듯이
멋진 자태를 뽐내며 푸른 삼나무 세 그루가 반긴다.
나무가 서있는 산모롱이 한쪽에는
커피와 함께 녹차를 비롯하여 전통 차를 팔고 있는 시인의 집이 아담하게 들어 앉아 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찻집에 들러 향긋한 향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싶지만 언제나 시간에 쫓기며 산행 길을 재촉한다.

요 며칠 맹위를 떨치던 매서운 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창한 봄날을 연상케 할 정도로 포근하다.
양쪽으로 고산준령의 높은 산줄기가 쌍벽을 이루는 깊숙한 협곡 중앙에
하곡동골 계곡과 함께 나란히 호젓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크고 작은 바위틈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고 잘잘 흘러가는 개울 물소리가 정겹다.
이름조차 없는 작은 폭포를 지나 한참을 올라서니
높은 바위절벽 위로 물이 흘러넘치는 몽계폭포(蒙磎瀑布)가 나그네를 반긴다.
백암산 상왕봉과 사자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울창한 숲과 우람한 바위에 부딪치며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가 갈 길이 바쁜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얼음조차 얼지 않았다.
뽀얀 포말을 일으키며 방울방울 부서져 내리는 물줄기가 마치 은빛을 발산하는 옥구슬을 보는듯하다.

폭포를 지나면 제법 높은 언덕길에 올라서게 되지만 이내 다시 평평한 계곡길이 이어진다.
눈 덮인 바윗돌 사이로 맑은 물이 쉼 없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가로 질러 다리가 놓여 있다.
둥근 아치형의 나무다리를 건너서니 새하얀 눈이 덮인 오솔길이 다시 길을 열어준다.
무성하던 잎사귀를 다 떨어뜨려버린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순백의 겨울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숲에서 살고 있는 산새들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다만 새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내며 사박사박 걸음을 옮겨놓는 소리 외에는 조용하기 그지없다.
좁은 개울을 건널 때는 거친 물소리가 경쾌하고 산길로 접어들면 다시 고요함에 젖어 든다.

일사천리로 이어질 것만 같았던 계곡 길은
서서히 높이를 더하더니 급기야 가파른 언덕 오름이 앞을 가로 막는다.
눈 덮인 오름은 걸음을 옮겨 놓을 때 마다 한번씩 몸을 뒷걸음치게 하며 많은 체력을 소모하게 한다.
이마에 송알송알 땀이 맺힐 무렵 힘겹게 백암산 상왕봉과 사자봉으로 이어지는
사거리 안부에 올라선다.
나뭇가지에 밤새 살포시 내려앉은 눈송이가 이른 봄 탐스럽게 꽃이 피기 시작하는
매화꽃송이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답다.
하얀 설경이 피어내는 꽃밭을 뒤로 하고 서쪽에 우두커니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사자봉 쪽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능선 길 같아서 쉽게 오를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가파르고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바른 사자봉 정상은 헬기장처럼 널찍한 빈 공터이다.
동쪽으로 섬처럼 우뚝 솟은 백암산 상왕봉과 도집봉이 손을 뻗으면 잡힐 듯 하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잡목 때문에 사자봉 정상만 돌아보고 다시 사거리 안부로 내려선다.
안부에서 백암산 상왕봉 정상으로 올라서는 능선 길은 사자봉 과는 달리 한결 부드럽다.
사방이 막힘없이 탁 트인 백암산 정상은 전망대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잠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휘둘러보는 주위의 풍광은 가히 일품이다.
날씨가 봄날처럼 따듯하고 포근하여 설화(雪花)를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백암산은 나그네의 소망을 외면하지 않았다.
눈앞에 하얀 매화꽃이 만개한 꽃밭을 연상케 하는 설화가 만발하여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황홀경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
향기만 없을 뿐이지 나뭇가지마다 곱게 핀 눈꽃 송이가 펼치는 풍경은 별천지나 다름없다.
사방 눈 닿는 곳마다 나뭇가지처럼 겹겹이 스카이라인을 이루며
곱게 뻗어 내린 산줄기들이 장관을 펼쳐 보인다.

북서쪽에는 입암산이 우뚝 솟아 있고
북동쪽에는 말발굽 형의 내장산 주봉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며
휘감아 돌아 나가며 아늑하게 들어앉았다.
북쪽에는 방장산이 하늘과 맞닿았고
남서쪽에는 병풍처럼 길게 늘어진 병풍산이 시원스럽다.
바로 앞쪽에는 상왕봉에서 순창새재로 곱게 이어지는
호남정맥 마루 금이 북동쪽에 있는 내장산과 맞닿다.
겨울 산은 하얀 눈 속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이 난다고 했던가!
하나 온통 은빛으로 뒤덮여 있어야 산등성이는 붉은 속살을 훤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바로 지척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정읍시가 정겹다.
단풍 산답게 능선에는 그 흔한 소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일까! 멀리 보이는 능선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나무들은
하나 같이 푸른색이 아닌 회색과 은색의 물결이다.

눈꽃이 빚어 놓은 환성적인 풍광을 뒤로 하고
야트막하게 굽이치며 달아나는 능선 길을 따라 내서면
널찍한 치마바위들이 주상절리처럼 성벽을 이루고 있는 도집봉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아찔한 도집봉에서 내려서니
이번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소나무 한 그루가 나그네를 반긴다.
분재처럼 제멋대로 휘어진 소나무가 산행의 운치를 북돋아 준다.
백양사 절을 돌아보려면 시간이 촉박하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백학봉에 정상에 올라선다.
앞에서 보면 그냥 밋밋한 하나의 평범한 바위봉우리이다.
그러나 남쪽 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백양사 절에서 바라보면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하여 백학봉이란 애칭을 붙여 주었다.
바위 전망대에 서니 이제까지 잔뜩 흐려있던 하늘이 유리알처럼 말갛게 갠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 무채색의 황량한 산줄기가 듬성듬성 초록빛을 발산한다.
서쪽의 사자봉에서 동쪽에 있는 상왕봉으로 긴 나래를 펼치며
곱게 파노라마 치는 산 능선이 정겨움을 더해준다.
저 멀리 남쪽 담양 병풍산 너머에는 내륙의 바다처럼 보이는 국민관광지 장성호가 아련하다.
동쪽으로 눈길을 주니 사방팔방 막힘없이 줄기를 뻗어 내리며
일렬로 나란히 누워 물결처럼 굽이치는 산 능선이 아스라하다.
깊은 산속에 널찍한 들녘이 들어앉았고 마을이 있다.
산허리를 휘감아 돌며 전북 정읍을 잇는 49번 국도와 추령고개 그리고
장승 촌이 한눈 가득히 들어온다.
바로 눈앞에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누워있는 백양사 계곡이 아득하다.
산이며 들마다 온통 하얗게 내려앉은 잔설이 산뜻한 겨울 맛을 느끼게 한다.
굽이치는 오솔길을 따라 가지런히 놓여 있는 나무계단을 밟으면서 내려선다.
수직의 가파른 계단 길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속세의 모든 번뇌를
대자연 속에 깨끗하게 씻어 버리고 내려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듯 하다.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가파른 내리막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내려서니
천길 단애의 깎아지를 듯한 바위절벽 틈새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고드름이 진풍경을 펼친다.
맞은편 펑퍼짐한 바위 정상에는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며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굽고 틀어진 나뭇가지가 하늘을 우러르지 않고
우산을 펼쳐 놓은 듯 둥그렇게 내려앉은 풍경이 탄성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내려서는 계단 길에서니 앞이 확 트이면서
눈앞에 보이는 백양사 대웅전과 요사채는
잘 정돈된 대궐 같은 기와집이 무리 지어 있는 듯 하다.
줄곧 이어지던 계단도 끝이 나고 드문드문 서있는 비자나무 사이를 헤집고
오솔길을 따라 내려선다.
서쪽에 솟을 대문처럼 커다란 바위가 천연의 울타리를 빚어 놓았고
앞쪽에는 장승처럼 선돌이 서 있다.

산 중턱에 동굴입구가 보여서 호기심에 올라서니
굴 안쪽에 돌로 빚어 놓은 약사여래불이 볼 가득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다.
약사여래불 뒤편에는 자연석을 가공하여 병풍처럼 둘러쳐 놓은 대리석의 층층 마다
자그마한 등불을 올려놓았다.
어두운 동굴 안쪽을 대낮처럼 밝게 비춰주는 등불이
마치 갓 피어난 붉은 연꽃을 보는 듯 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 바위 아래쪽에는 석간수가 솟아오르고 있다.
물이 솟아오르는 곳에 부처님을 모셔 놓은 것이 경이롭다.
기록에 의하면 예전에 동굴 안에 영천암이란 자그마한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암자는 허물어져 버린 지 오래되었고
지금은 동굴 전체가 하나의 법당처럼 깔끔하게 꾸며져 있다.
앞쪽 경사진 빈 공터에는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여러 개의 돌탑이 앙증맞게 자리 잡고 있다.
바위틈에서 솟아올라 오는 청정 석간수는 약수처럼 마실 수 있다.
목에 갈증도 풀 겸 놓여 있는 바가지로 물 한 모금을 떠서 마시니 그 맛이 일품이다.
영천암에서 잰 걸음으로 몇 발자국만 옮기면 약사암이다.
널찍한 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고풍스러운 멋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나그네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앞쪽에는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난대성 침엽수 종류의 하ㅏ인
약5천 그루의 비자나무가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빼곡하게 줄지어 하늘을 가리고 있는 푸른 비자나무 숲길은
송림 속에서 산림욕을 즐기는 만큼이나 운치가 있다.
호남의 명산답게 계곡마다 물이 흔하다.
자연스럽게 운율을 맞추며 흘러내리는 계곡물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느낀다.
비자나무 숲길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 널찍한 자연관찰로 길을 따라 내려서면
백암산 산줄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여서 빚어 놓은 쌍계루 연못이다.
천연고찰 백양사는 맑은 청수가 푸른 연못을 이루고 있는 위쪽에 아담하게 들어 앉아 있다.
백제 무왕 때(632년) 세워진 이 절은 산 이름을 따 백암사로 불리다,
조선 선조 때(1574년)이름을 백양사로 고쳤다.
주지였던 지안 선사가 읽은 법화경 소리를 듣고
하얀 산양 한 마리가 사람으로 환생했다고 해서 백양사로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사채 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범종각이 눈과 마주친다.
북쪽의 야트막한 야산에는 겨울을 나고있는 회색빛의 나무 숲 사이로
소나무처럼 푸른 비자나무가 상큼한 겨울 맛을 느끼게 한다.
중앙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해서 크고 작은 전각(殿閣)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고찰 백양사는 백암산의 주인 격이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하얀 바위산인 백학봉은 백미이다.
특히 한 일자로 길게 누워있는 대웅전 전각과 뒤편에 백학봉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광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대웅전 앞마당 한쪽에 수령이 무려 350년 된 노거수 고불매(古佛梅)와 보리수나무 또한
눈 여겨 볼만하다.
매년 봄 3월 말경에 진분홍빛 꽃을 피우는 홍매화로
꽃의 색깔이 아름답고 향기가 은은하여 산사의 정취를 북돋아 준다.
아래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뻗은 줄기는 고목의 멋진 품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모양도 깔끔하여 매화 원래의 고고한 자태와 기품이 그대로 살아 있다.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기리자는 뜻에서 고불매라는 산뜻한 애칭을 붙여서 부르고 있다.
백양사절에서 일주문까지 1.5km에 드리워진 단풍 터널은 일품이다.
길게 이어지는 널찍한 산책로는 혼자만의 낭만과 사색을 즐기기에는 그만이다.
내장사 단풍 길과는 사뭇 다른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내장사 단풍 길은 인공적인 미가 많이 느껴진다.
반면 백양사 단풍 길은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자연적인 비경을 품고 있다.
노거수(老巨樹)가 되어 우람한 몸매를 하고 서있는 길참나무를 비롯해서
비자나무와 많은 종류의 단풍나무가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정읍 내장산이 깎아지른 절벽을 두른 남성적 분위기라면,
백암산은 백학봉 학바위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절벽이나 바위지대도 없다.
전체적으로 산 능선이 부드럽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여성적인 산이다.
내장산의 단풍이 세련되고 깔끔한 아가씨처럼 화려한 반면,
백암산 단풍은 질박한 토기처럼 은근하고 수수한 자연미를 뽐낸다.
아기단풍, 당단풍, 좁은단풍, 털참단풍, 네군도단풍 등 무려 13가지 단풍나무가
가을철을 오색으로 붉게 물들인다.
인공미가 가미되지 않은 백암산에서 자생하고 있는 단풍은
일명 ‘애기단풍’ 이라 불릴 정도로 작지만 색깔이 진한 것이 특징이다.
백암산은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은 물론 파릇한 새순이 돋는 봄에도
싱그러움을 한껏 발하는 아름다운 산이다.
겨울설경 또한 국내의 어느 산과 견주어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

소리 없이 살며시 다가오는 봄을 느끼며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서 내려서니
어느새 백양사 일주문이다. “단풍은 내장산이요 절은 백양사란 말이 있다.”
내장산의 단풍에 밀린다고 하지만 정작 산악인들은 오히려 백암산을 ‘으뜸 산’이라 평가한다.
산세와 풍광, 생태계, 역사에서 훨씬 넉넉함을 안고 있는 산으로 각광받고 있다.
일주문을 나서서 바라보는 백양사의 풍광은 또 따른 별천지이다.
그 별천지에 짧기만 따뜻한 겨울 햇살이 곱게 부서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