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쉬지 않고 내려지던 폭염경보와 주의보 그리고 숨을 턱턱 막히게 하며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처럼 모든 것을 달구었던 무더위도 처서(處暑)를 지나며 그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나 마지막 늦더위가 여름 못지 않은 날씨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무덥다. 쉼 없이 흘러가는 계곡물소리, 몸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 숲 속에서 매미들이 화려한 운율에 맞추어 들려주는 자연의 화음은 잊지 못할 여름날의 즐거운 추억이다. 번잡한 도심을 뒤로하고 늦더위를 피해 녹음이 짙게 드리워진 충남 계룡 향적산 농바위를 찾아서 길을 나선다. 향적산 탐방은 산자락에 아담하게 들어앉은 계룡산무상사 에서 서쪽으로 올라서며 시작한다. 2000년 3월에 창건된 무상사는 “마음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숭산 큰스님의 뜻을 이어 설립된 국제선원(國際禪院)이다. 국제선원이란 이름에 걸맞게 무상사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의 선에 관심이 있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숭산 큰스님의 참선 수행을 따르고자 하는 내, 외국인 스님들이 상주 하는 사찰이다. 무상사에서 향적산 정상으로 올라서는 길은 경사가 급하지 않은 널찍한 오르막길이다. 길모퉁이 풀밭에는 처음 보는 생소한 야생화인 쥐꼬리망초가 이곳을 찾은 나그네를 반긴다. 처서를 지났다고는 하나 아직 날씨는 한여름 못지않게 무덥다.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숲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지만 하늘에서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의 영향으로 인해 벌써 땅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발걸음을 한걸음씩 옮길 때 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물줄기처럼 흘러내린다. 유난히도 남보다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조그만 더워도 많은 양의 땀을 흘린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한낮의 땡볕을 피해 산바람도 골바람도 모두 꼭꼭 숨었나 보다. 그 흔한 바람조차 불어오지 않는다. 활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숲 속에는 잎이 무성한 칡덩굴이 산기슭을 뒤덮고 있다. 칡도 꽃이 핀다는 것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좀처럼 칡꽃을 보지는 못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칡꽃송이가 무성하게 우거진 파란 잎사귀 사이로 얼굴을 보여준다. 탑처럼 층층이 쌓아 올린 보라색의 칡꽃송이가 정겨움을 더해준다. 끝이 보이지 않을 듯한 오르막길은 산 중턱에 이르니 경사가 완만한 평평한 길로 이어진다. 이팝나무 꽃송이를 닮은 산꿩의다리가 나그네를 보고 방긋 미소 짓고 또 다른 공터에는 등골나물이 흐드러졌다. 짙은 녹색이 드리워진 풀숲에는 앙증맞게 하얀 꽃망울을 터뜨린 꽃범의꼬리가 나그네의 눈길을 멈추게 한다. 널찍한 임도 길을 이으며 골 깊은 골짜기로 접어드니 산속에 붉은 향토 흙으로 지은 집들이 여러 채 들어 앉아 있다. 겉으로 얼핏 보아서는 깊은 산속에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는 작은 촌 동네를 연상케 하지만 이곳은 무속인 들이 살고 있는 기도원이다. 기도원 앞쪽에는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나무 아래쪽에는 조그마한 약수터도 있다. 시원스럽게 졸졸 흘러내리는 약수로 목의 갈증을 해소하고 주위를 휘둘러본다. 빈 공터에는 무궁화나무도 심어져 있고 붉은 색의 분꽃과 물붕선 등 많은 종류의 꽃들이 이곳을 찾은 나그네를 반긴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모여서 하나의 조그마한 계곡을 이루고 있다. 널찍한 임도 길은 여기서 끝이 난다. 기도원에서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루어진 오솔길을 이으며 올라서니 산자락 양지바른 곳에 또 다른 기도원이 들어 앉아 있다. 유리알처럼 맑은 계곡물은 생활에 필요한 식수원이 되어 준다. 산속에 있는 오두막을 연상케 하는 집 앞마당에는 갖가지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집 뒤편에는 하얀색의 꽃망울을 터뜨린 참취나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 주위에는 붉은색 꽃송이가 탐스러운 물봉선이 꽃망울을 열고 아예 꽃밭을 이루고 있다. 풀밭에는 노란색 꽃송이가 일품인 수까치깨가 야생초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운 자태를 보여준다. 까치들이 먹는 깨인가! 꽃 이름이 참으로 곱다. 기도원에서 하얀색의 꽃송이가 애처롭게 보이는 뚝갈을 뒤로 하고 언덕길로 올라서면 헬기장이다. 헬기장에서 산중턱을 가로 질러 남쪽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약10분 정도 올라서면 해발 574m미터인 향적산(국사봉) 정상이다. 충청남도 계룡시 엄사면과 향한리 그리고 논산시 사월면 대촌리의 경계를 이루는 향적산은, 북쪽에 있는 계룡산에서 뻗어 나온 산릉(山稜)으로서 백악기의 대보화강암(大寶花崗岩)을 암맥상으로 관입한 문상반암(文象斑巖)과 각종 암맥류와 석영맥 등의 반심성암체로 이루어진 험준한 암석산지이다. 향적산이란 명칭은 이곳에서 공부하고 도를 깨우치기 위하여 용맹 정진하는 사람들의 땀과 향기가 쌓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계룡산의 향기가 가장 짙게 밴 산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을 도읍으로 정하기 위하여 이곳에 올라 국사(國事)를 논하였다 하여 국사봉(國事峰)이란 애칭이 붙여졌다는 유래가 전해온다. 실제로 동쪽아래 산중턱에는 국사암이란 작은 암자가 있다. 고스락(정상)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천지창운비와 오행비가 세워져 있다. 천지창운비(天地創運碑)는 한 변이 약3m쯤 되는 정사각형의 얕은(20㎝ 정도)담 안의 돌비석으로, 높이는 2m이며 머리에 관을 얹은 모양새이다. 비의 동쪽 면에는 천계황지(天鷄黃池), 서쪽 면에는 불(佛), 남쪽 면에는 남두육성(南斗六星), 북쪽 면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또한 담을 이루는 네 귀퉁이의 기둥 돌에도 ‘원. 형. 이. 정(元. 亨. 利. 貞)’이란 글자가 한 자씩 새겨져 있다. 바로 옆에는 오행비(五行碑)가 천지창운비와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오행비는 높이 약1.6m의 사각 돌기둥으로 서면에 화(火), 남면에 취(聚: 모이다, 무리의 뜻), 북면에 일(一), 동면에 오(五)자가 새겨져 있다. 북한에 살았던 조미양 할머니가 구월산에 있는 단군 성조의 얼을 이곳에 옮겨 모시고 단군 성조를 받드는 활동을 펼치다 1948년에 작고하자 며느리 손씨 부인이 시어머니의 공덕을 기리고 그 정신을 받들기 위해 여기에 비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지창운비와 오행비의 글과 글자의 뜻을 정확하게 풀이한 사람은 없다. 최근에 세워놓은 듯한 향적산 정상 석은 정상에서 약간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국사봉 정상은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민둥산이다.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이면서 주위에 보이는 모든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남쪽방향 산자락에 국사봉 전망대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나무로 설치된 전망대 주위에는 보라색의 꽃송이가 흐드러진 닭의장풀이 운치를 북돋아준다. 정상 바로 아래쪽에는 통신 중계 탑이 서있고 그 너머 북쪽으로 열두 푹 바위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계룡산 산줄기가 동서로 장쾌하게 파노라마 친다. 서쪽은 연천봉 능선이, 동쪽으로는 천황봉 능선이 뻗어 장관을 이루며 하늘과 맞닿았다. 산 능선에서 느끼는 날씨는 무더운 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치솟아 오르지만 하늘은 새파란 가을 하늘처럼 높고 청명하다. 하늘에 자유자재로 두루뭉실 떠 있는 하얀 솜털 같은 구름송이가 산마루에 드리워지며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날씨가 청명하고 공기가 맑아 물길이 굽이치듯 사방으로 출렁이며 내달리는 높고 낮은 산이 모두 가시권에 들어온다. 바로 앞 전방에 계룡대 뒤편에 우뚝 솟아 있는 조개봉과 석장산이 선명하게 얼굴을 드러낸다. 좀더 아래쪽으로 눈길을 주니 고층 빌딩과 아파트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앉은 계룡시 뒤편으로 충청남도에서 제일 높다는 서대산이 아련하게 하늘 금을 그린다. 남쪽 저 멀리 아스라이 옅은 안개가 낀 산자락 뒤로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대둔산이 아련하고 이웃에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천호산이 서로 자웅을 겨룬다. 북쪽에 터줏대감처럼 하늘 높이 우뚝 솟은 계룡산에서 남향으로 길게 산줄기를 뻗어 내린 산줄기는 중앙에 국사봉을 솟구쳐 놓은 다음 남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끝 간 데 없이 긴 나래를 펼친다.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진 산등성이에 낙타 등처럼 솟구친 농바위는 향적산이 품고 있는 또 다른 백미 이다. 오솔길처럼 굽이치는 능선을 이으며 농바위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산자락 곳곳에 식물원에서나 불 수 있었던 분홍색 꽃망울을 터뜨린 큰꿩의비름이 이곳을 찾은 나그네를 보고 방긋 미소 짓는다. 보석 같이 빛나는 자그마한 꽃송이 위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나비들이 사뿐히 내려앉아 열심히 꿀을 따고 있다. 경사가 완만한 꿈길 같은 오솔길 주변에는 산씀바귀, 노란색 꽃송이가 탐스러운 쇠서나물은 민들레 와 사데풀과 꽃송이가 너무나 닮아 구별조차 어렵다. 집채만 한 커다란 농바위 정상에서 휘둘러보는 풍광은 천하(天下)일품의 절경이다. 눈앞에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펼쳐지는 풍광은 국사봉을 능가한다. 남북으로 분수령을 이루는 국사봉 산 능선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풍경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동쪽은 험준한 고산준령들이 첩첩이 골을 이루며 광활한 바다에서 거센 파도가 출렁이듯 길게 파노라마 치는 산 너울이 아름답다. 반대로 서쪽은 계룡산 남부 능선에서 발원한 주천과 세천 그리고 대촌천 등의 크고 작은 지류들이 합류하여 대명분지를 빚어 놓았다. 대명분지 사이로 높이가 나지막한 야산들이 다도해 섬처럼 올망졸망 모여 있는 사이로 반듯반듯한 논들이 바둑판처럼 나란히 이웃하며 줄지어 들어앉았다. 새파란 하늘에 두리둥실 떠 있는 하얀 구름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한 폭의 그림 같은 들녘에는 벌써 소리 없이 성큼 다가온 가을빛이 곱게 내리고 있다. 변화무쌍한 산세에 감탄하고 짙은 신록에 감동했지만 눈앞에 노랗게 물드는 들녘과 야트막한 야산이 연출하는 수채화 같은 풍경은 글과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환상적이다. 하늘아래 이보다 아름다운 곳이 있어나 할 정도로 농바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나그네의 마음을 심하게 요동치게 한다. 농바위 전망대에서 멋진 풍광을 감상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국사봉으로 돌아 온다. 국사봉에서 북쪽 능선을 이으며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을 10분 정도 내려서니 처음에 만났던 헬기장이다. 널찍한 헬기장은 초록색의 싱그러운 풀들이 뒤덮고 있다. 양탄자처럼 부드러운 풀밭을 헤집고 핑크색의 탐스러운 꽃망울 터뜨린 산비장이가 정겨움을 더해준다. 산비장이 뿐만 아니라 왕고들빼기, 미국쑥부쟁이, 무릇도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들녘과 산에서 만나는 청초한 야생화는 언제 보아도 소박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이 물씬 풍긴다. 헬기장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서는 능선 길은 울창한 송림 숲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준다. 호젓한 능선 길 상(上)에 자연이 빚어 놓은 작품이라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바위가 탑처럼 층계층계 올려져 있는 기암을 만난다. 바로 이웃에는 커다란 거북이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있는 듯한 또 다른 기암이 산행의 운치를 더해준다. 여러 종류의 기암으로 형성된 바위와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진 육산이 서로 어우러진 혼합형 산답게 능선 곳곳에서 시원한 눈 맛을 즐긴다. 기암을 뒤로 하고 동네 뒷동산처럼 보이는 나지막한 해발513m미터인 바위전망대에 올라선다. 바로 눈앞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계룡산 천황봉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흰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계룡산은 한눈에 보아도 영산(靈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부터 계룡산 정상 까지는 자연휴식 년제 구간이어서 더 이상 북쪽으로 오를 수가 없다. 오솔길을 이으며 서쪽으로 내려서는 안부에는 봄에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던 가막살나무 가지에 어느새 잘 익은 붉은 열매가 수북하게 열려있다. 오솔길을 이으며 서쪽으로 발걸음을 분주히 옮기며 내려서면 삼거리 갈림길이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민재까지는 널찍한 임도 길처럼 운치가 넘치는 호젓한 산책길이다.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민재에는 간단하게 운동을 즐길 수 있는 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민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이으며 발걸음을 재촉하며 내려선다. 울창하게 나무들이 우거진 숲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흐른다. 그 흔한 산새소리도 여름 내내 산속에 메아리처럼 고운 선율이 되어 울려 퍼지던 매미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아직은 따갑지만 울창한 숲을 뚫고 오지는 못한다. 얼굴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방울이 뚝뚝 물방울이 되어 땅 위에 떨어질 무렵 숲에서는 서늘함이 온몸으로 전해온다.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으로 이루어진 굽이치는 오솔길을 이으며 내려서니 깜짝 놀래주려는 듯 홀연히 산속에 산신각이 아담하게 들어앉아 있다. 산신각아래쪽에는 현대식 건물과 약수터가 자리하고 있다. 작은 개울에서 흘러내리는 옥빛의 맑은 물은 시원한 약수를 제공해 준다. 약수터에 있는 작은 바가지로 물 한 모금 떠서 마시니 그 맛이 일품이다. 여기서부터는 오솔길이 끝이 나며 널찍한 임도 길이 이어진다. 임도 길과 함께 나란히 어이지는 실개천에는 제법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린다. 임도 길을 이으며 남쪽으로 내려서면 골짜기 안쪽에 마치 분지처럼 너른 땅이 펼쳐진다. 양지바른 언덕에는 깊은 산중에서나 볼 수 있는 오두막집을 연상케 하는 외딴집이 자리하고 있다. 텃밭에는 들깨와 고추가 심어져 있고 길모퉁이에는 원예종인 봉선화와 플록스등 많은 종류의 여름 꽃들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이곳을 찾은 길손을 반긴다. 개울가에는 물봉선화가 빼곡하게 자리를 메우고 있다. 실개천의 물이 모여 너른 내를 이루고 흘러내리는 물의 양도 많아 진다. 이렇게 흘러내리는 물을 가두어 내를 가로질러 사방댐을 만들어 놓았다. 사방댐 주변에는 여름한철 물놀이를 즐기며 쉬어 갈 수 있게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사방댐에 모인 물은 다시 무상사 아래쪽에 있는 면적이 넓은 맨재 저수지로 흘러 든다.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벗 삼아 임도 길을 이으며 남쪽 양지바른 언덕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무상사에서 향적산 탐방을 모두 마친다. 대구로 출발하기 전 천호산 산자락 아래쪽에 있는 개태사를 둘러보았다. 대둔산과 천호산 그리고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금남정맥의 길목에 아담하게 들어앉은 개태사(開泰寺)는 고려 태조 19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하고 이곳에 국찰로 창건토록 한 국립 개국 사찰이다. 이규보 선생이 쓴 <개태사 조전원문>에 의하면 그때 당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왕이 명하여 개태사를 창건토록 하였는데, 이는 태조 왕건이 전쟁을 하면서도 백성이 생업을 유지하게 하며 나라를 세웠음은 부처님과 산신령의 도움이라 생각하고 절을 창건하고 개태사라 불렀다. 또한 이 일대는 백제의 계백장군과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황산벌이 가깝고 고금을 통해서도 군사, 교통상의 요지로서 사찰 주변에는 약6km 미터에 달하는 토성이 있었고, 승병이 주둔하여 사찰을 수비하였다고 전한다. 하늘에서 가을을 재촉하는 소낙비를 맞으며 천연고찰 개태사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앞마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일주문 좌측에는 고목이 된 소나무가 우측에는 측백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화려한 단청이 일색이 여느 사찰과는 달리 단아함과 소박함이 돋보이는 개태사는 지금도 옛 모습을 잃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을 마주보며 스님들이 거주하는 요사채와 종무소가, 그리고 대웅전 바로 앞쪽에는 오층석탑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마당 안쪽 모퉁이에는 아담한 정원을 꾸며 놓았는데 이제까지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노랑 상사화가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개태사에서 눈 여겨 불 것은 백일 동안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는 배롱나무 옆에 있는 철확과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석불상이다.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 철확(開泰寺 鐵鑊)은 절을 창건할 당시 주방에서 사용했던 가마솥이다. 테두리가 없는 벙거지형 모자를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 철확은 23㎝ 높이의 곧바로 선 테두리가 솟아 있고, 그 아래로 20㎝ 정도의 경사면을 이루다가 다시 둥글게 급경사를 이루며 바닥에 연결되어 있다. 두께는 3㎝정도이고 외부의 밑바닥은 직경이 약90㎝의 둥근 굽이 있어 불을 효과적으로 잘 받도록 만들어져 있다. 용도는 개태사의 전성기에 된장을 끓이던 가마솥이다. 솥의 규모만 보아도 이 절을 창건할 당시 절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상상이 된다. 그러나 개태사 철확은 사찰이 페어가 되자 벌판에 버려져 있다가 조선 고종24년(1887년) 정해 년의 대홍수로 약2km미터 정도 하류로 떠내려갔던 것을 최근에 이곳으로 옮겨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개태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 석불상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15년 넘게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돌아보았지만 대웅전에 아미타 삼존석불이(阿彌陀 三尊石佛)이 봉안되어 있는 것은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석불이라면 제일 먼저 떠오는 것은 깊은 산속에 있는 자연석에 조각하여 놓은 마애불이다. 그러나 볼가 득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개태사 석불입상(石佛立像)은 마애불과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개태사 아미타 삼존석불은 고려 초기 개태사 건립(940년)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이다. 단정하면서도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옷자락 등 에서는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초기의 굳건한 기상이 잘 드러나 있다. 보물 제219호인 개태사 삼존석불상과 경내를 유심히 둘러보고 나오니 잠깐 멈추었던 소낙비가 다시 내린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서늘한 빗줄기 뒤로 서서히 퇴장하는 여름의 뒷모습이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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